부드러운 개입 ‘넛지’ 노벨상 툭 찌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0일 03시 00분


베스트셀러 저자 세일러 경제학상
엉뚱하고 비이성적 인간심리 주목… 변화 유도위한 행동경제학 개척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행동경제학의 거장인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72)가 수상했다. 세일러 교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넛지’의 공저자이면서 ‘승자의 저주’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9일(현지 시간) “세일러 교수는 행동경제학의 개척자”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문으로서 논란이 많고 주변부에 머물렀던 행동경제학의 위상을 당당한 주류 경제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세일러 교수는 코넬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거쳐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일러 교수는 기존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시킨 행동주의 경제학을 1970년대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 등과 함께 행동경제학의 선두주자로 불린다. 두 교수는 앞서 2002년과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기존의 경제학 이론은 사람들이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지만 세일러 교수는 정작 실상은 이와 다르다고 봤다. 주변 환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개인적 편견으로 엉뚱하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자주 내린다는 것이다.

그가 개발한 ‘심리 회계(mental accounting)’ 이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이를 다르게 분류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생긴 돈을 ‘공돈’으로 분류해 쉽게 써버린다는 설명은 로또 당첨자 상당수가 파산하는 현상도 해석해 냈다.

▼ 소변기 파리그림-연트럴파크 베개모형… 지구촌 변화 이끈 넛지효과 ▼

변기에 파리를 그려 넣기만 해도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80% 줄어든다(왼쪽 사진). 넛지 효과는 횡단보도 앞 인도에 노란
 공간을 만들어 어린이 교통사고를 줄이는 ‘옐로카펫’ 등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변기에 파리를 그려 넣기만 해도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80% 줄어든다(왼쪽 사진). 넛지 효과는 횡단보도 앞 인도에 노란 공간을 만들어 어린이 교통사고를 줄이는 ‘옐로카펫’ 등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네이버 블로그 캡처·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는 지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역시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빚을 지고, 뻔한 미래조차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비이성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2001년 시카고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 중 세일러 교수의 ‘의사결정론’을 수강한 조훈 서정대 교수는 “매 수업마다 학생을 A팀과 B팀으로 나눠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지 설문하고 토론하던 교육 방식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넛지는 2009년 한국에서 번역본이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인기를 끈 뒤 올 8월까지 124쇄가 발행된 베스트셀러다. 출간된 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여름 휴가지에서 읽은 뒤 청와대 참모들에게 선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의미이지만 세일러 교수는 이를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으로 새로 정의했다. 강요보다는 은근한 개입이 더 큰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무실을 수평적으로 만드는 것만으로 직원 간 소통이 늘고 진열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특정 상품의 판매를 늘릴 수 있다고 세일러 교수는 설명했다. 넛지를 활용한 캠페인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파리 그림이 그려진 암스테르담 공항의 소변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라는 말이나 파리를 겨냥하라는 문구가 없어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변을 줄이는)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넛지 효과’를 노린 캠페인이 늘고 있다. 고성방가에 시달리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 주택가에는 근처 공원(연트럴파크)에 베개 모형을 설치해 야간 소음을 줄였다.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안전한 공간에서 어린이가 보행신호를 기다리게 하고 운전자도 어린이를 잘 알아볼 수 있게 ‘옐로카펫’을 설치하고 있다. 길거리에 환경미화원 스티커를 붙여 쓰레기 무단 투기를 줄이기도 한다.

세일러 교수는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제2회 기업가정신 주간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넛지의 원칙”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일러 교수는 미래의 보상보다 현재의 이익을 중시하는 인간의 특성을 이용해 저축 플랜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가진 돈을 저축하라고 강요하기보다 미래 봉급 인상분을 예금 계좌에 넣어 저축액을 늘리도록 설득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으로 저조했던 미국의 저축률을 극적으로 끌어올려 나라를 빚더미에서 구한 경제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세일러 교수는 그동안 여러 차례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다. 9일 수상자 발표 직후 가진 공동 영상 인터뷰에서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뻤다. 이제 더 이상 동료 교수 파마와 골프 치면서 ‘파마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농담했다. 그가 언급한 유진 파마 교수는 2013년 로버트 실러 교수와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2억 원이 넘는 노벨상 상금을 어떻게 쓸 것이냐는 질문에는 “가장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쓸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위기 당시 미국 월가의 탐욕을 그린 영화 ‘빅쇼트’에 해설자로 출연해 “한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성공할 것으로 믿고 곧장 나아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종=최혜령 herstory@donga.com / 송충현 기자
#노벨 경제학상#리처드 세일러#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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