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와 인력 투자는 한 번 하면 돌이킬 수가 없는데, 요즘같이 경기가 안 좋을 때는 두 번 세 번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자동차 업체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돼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며 이같이 털어놨다.
글로벌 경기침체-규제사슬-세제혜택 축소라는 3중고로 기업들이 R&D 투자를 줄이고 있다.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로 공장에 재고가 쌓이는 가운데 기업의 설비 투자도 얼어붙을 위기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재정 투입 같은 미봉책으로는 경기 활성화에 한계가 있는 만큼, 중장기 미래 성장의 원천인 R&D와 설비투자 활성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 불안한 미래에 R&D는 언감생심
국내 기업들의 R&D 투자가 쪼그라든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한국의 주력업종인 조선 철강 해운 건설 등은 글로벌 공급 과잉과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둔화가 겹치면서 구조조정의 파고에 직면해 있다. 당장 살아남기가 절박한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R&D 투자는 언감생심인 것이다.
기업이 R&D에 소극적인 데는 곳곳에 남아있는 규제도 한몫한다. 정부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그린벨트를 풀어 R&D단지로 조성하고 규제프리존 특별법을 통한 지역특구 개발을 약속했다. 하지만 수도권 공장총량제, 신·증설 제한, 대학 신설 규제 등 이른바 ‘덩어리 규제’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 같은 대책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이런 마당에 국회는 재벌, 대기업, 부자 감세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기업 R&D 세액공제율을 R&D 투자액 대비 총액의 최고 6%에서 지난해 2∼3%로까지 내리며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 있던 투자 유인마저 꺾어 버렸다. ○ 쌓이는 재고에 설비 투자도 위축
올해 1월 국내 자동차 업계 수출 실적은 그야말로 ‘쇼크’였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수출량이 각각 23.2%와 26.7%나 줄어든 것을 비롯해 업계 전체적으로 18.8%가 감소했다. 정부가 개별소비세 인하 혜택 기간을 연장하면서 내수 경기를 다소 살리긴 했지만 수출은 어쩔 수 없었다. 2월에도 현대차의 수출량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하면 22.4%, 전월인 1월에 비하면 8.2%가 줄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신흥국 경기침체와 저유가 기조로 수출량이 크게 줄었다”고 밝혔다.
국내 제조업체들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인 재고율(출하량 대비 재고량의 비율)이 크게 올라갔다. 27일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의 재고율은 2010년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재고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상품의 출하보다 재고가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는 의미다.
특히 국내 주력 산업분야인 전자와 자동차 산업이 재고율 상승을 이끌고 있다. 전자분야 중에서도 반도체(177.3%)와 전자부품(142.1%) 재고율이 가장 높았다. 반도체의 경우 지난해 9월 재고량이 2014년 9월에 비해 99.5%나 늘어나기도 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동차와 전자 등 업종은 특성상 수요 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워 경기 하강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확장적 재정·통화 정책을 지속하고 억눌린 소비심리를 자극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 “올해 기업 투자 더 위축될 것”
문제는 올해 여건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연초부터 수출이 두 자릿수 감소율을 보이는 상황에서 중장기 투자를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달 1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한 30대 그룹 투자계획에 따르면 설비투자는 전년보다 7.1% 증가한 90조9000억 원에 이르지만 R&D 투자는 0.1% 증가한 데 그친 31조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정부 R&D 예산(18조9000억 원)도 지난해 대비 0.1% 늘었을 뿐이다. 민관 어디에서도 R&D 투자를 기대하기 어려워 자칫 외환위기 후 첫 R&D 투자 감소라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기업의 투자 계획이나 정부 예산 등에 미뤄봤을 때 올해에도 R&D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기업의 R&D를 유도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돈 안 드는 규제 완화와 투자 장려정책으로 신산업, 융·복합 산업이 활성화되도록 해 경제 활로를 뚫어야 한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세제 혜택 확대와 규제 완화를 주문했다.
단순히 투자 규모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R&D와 설비투자의 효율성을 끌어올리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박희재 산업부 R&D 전략기획단장은 “그동안 많은 R&D 연구가 산업 현장과 동떨어진 채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등재만을 위한 논문을 쓰거나 장롱 특허를 내고 마는 데 그쳐왔다”며 “한국의 R&D 투자 규모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앞서 있는 만큼 이제는 성과를 내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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