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의 다른경제]규제를 물에 빠뜨릴 공무원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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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유통회사 임원인 K 씨는 최근 중앙부처 공무원에게 “규제 때문에 투자가 지연되고 있는데 관련 규제를 완화해줄 수 없느냐”고 문의했다. 공무원은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에 민원을 올려보라”고 했다. 공무원 스스로는 안 되고 청와대가 지시하면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취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신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를 일단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릴 규제만 살리도록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직후의 일이다. 최소한의 금지사항을 빼고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정치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현장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아이디어로 보는 것이다.
뒤에서 권한만 즐기는 부처

이동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이 지난해 11월 케이블TV 및 알뜰폰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을 인수합병(M&A)하기로 발표한 뒤 재계와 정부가 보인 행보에는 한국형 규제의 민낯이 투영돼 있다.

먼저 이 M&A를 4차 산업혁명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다른 업종 간 융합이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좁은 국내에서 정해진 파이를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한 이합집산은 구태의연한 ‘덩치 키우기’일 뿐이다.

2, 3위 사업자인 KT와 LG유플러스는 국회에 계류 중인 ‘통합방송법’이 통과되면 ‘전국사업자(SK브로드밴드)가 지역사업자(CJ헬로비전) 지분을 33%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는 셈이어서 합병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KT가 이미 스카이라이프 지분을 49.99%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아전인수 해석이다. KT와 LG유플러스는 SK텔레콤이 공격 경영을 할 때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기업이 과거에 안주하면서 치고받는 동안 정부는 규제 권한을 즐기고 있다.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공청회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었다. 여론수렴 절차를 거쳤으니 다음 달 공정위가 M&A 인가 여부를 발표하는 일만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핵심 이슈인 M&A 심사기준, 인가조건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 민감한 규제가 걸려 있는 사안에 대해 주말에 결과를 전격 발표하고 베일 뒤로 숨는 규제당국의 구태를 또 보여줄 모양이다.

음지의 규제를 양지로 끌어낼 수 있는 당국자는 조신 대통령미래전략수석비서관이다. 그는 1999년부터 2010년까지 SK텔레콤 전무, SK브로드밴드 사장 등을 지낸 SK 출신이다. 청와대에서 합병과 관련해 모종의 신호를 주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M&A 심사 기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규제개혁도 바둑개혁처럼

작고한 조남철 전 한국기원 이사장은 1980년대 초반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을 찾아가 한국기원 총재를 맡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중국 일본을 능가할 고수를 키우는 목표를 제시했다. 김 회장은 연간 프로 승단자를 두세 명으로 제한한 당시의 두꺼운 진입장벽을 깨기 위해 연구생 제도를 도입했다. 상금 5000만 원짜리 대회를 열어 경쟁을 북돋았다. 알파고와 당당히 맞선 이세돌 9단은 이런 개방과 경쟁의 토양에서 자랐다.

구체적인 목표를 통해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규제개혁 모델이 필요하다. 지금 공무원들은 “규제를 물에 빠뜨리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2년만 참으면 된다’는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다. 차라리 대통령이 다음 규제개혁장관회의 때 “현재 1만4600건인 등록규제를 올해 말까지 5000건 이하로 줄이라”고 숙제를 고쳐서 내주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규제#공무원#규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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