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값 못받는 신약… 만들고도 한숨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1일 03시 00분


미흡한 가격산정제가 수출 발목 잡아

A제약사는 2011년에 국내 최초로 고혈압치료제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 18년 동안 510억 원을 투입한 결과였다. 당장 해외에서 반응이 나왔다. 터키와 중남미의 몇몇 국가에서 약을 테스트한 의사들이 신약에 높은 점수를 줬다. 중남미 일부 국가에서 실제 수출 계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A사 직원들은 ‘수출 대박’을 기대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에 따라 A사는 본격적인 유럽시장 공략을 개시했다. 먼저 유럽의 관문인 터키 시장을 노렸다. 2011년 말, 연간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현지 1위 제약 업체와 500억 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었다. A사 관계자는 “첫 대규모 수출이라 마진을 많이 줄였기 때문에 우리가 얻는 이익은 크지 않았다”며 “그래도 대량 수출의 문을 여는 신호탄이어서 회사는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터키 제약사가 수출 단가를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까지 낮춰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A사는 고민 끝에 수출 계약을 백지화했다. 터키 제약사가 요구한 가격으로 수출할 경우 다른 나라에도 같은 가격으로 수출할 가능성이 커져 대형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18일 2016년도 업무보고에서 신약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신약 가치를 약가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허가받았거나 해외에 수출한 신약에 대해서는 약가를 책정할 때 우대하겠다는 것.

20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이번 정부 발표에 대해 국내 제약업체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에 대한 불신이 적지 않다. 한 제약업체 관계자는 “A사와 비슷한 상황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의 신약 약가 정책이 국내 업체 신약 개발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말했다.

신약은 특허기간이 만료되면 다른 업체들이 복제약을 만들 수 있다. 복제약 약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신약(최고가)의 53.55% 내외에서 책정한다. 알약을 필름으로 바꾸는 등 약의 형태를 바꾼 개량 신약은 대체로 신약과 비슷한 수준에서 가격이 책정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A사가 개발한 것 같은 신약은 약가를 산정하는 기준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신약이 개발돼도 약가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26개의 신약은 이미 나와 있는 같은 효능의 타사 제품들과 비교해 가격이 산정됐다. A사의 신약은 600원대 후반으로 4, 5년 전 나온 제품들(900∼1000원)보다 낮게 책정됐다. 업계 관계자 김모 씨(35)는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신약을 만들었는데 그 가치는 약가에 반영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업체가 과감히 신약 개발에 거금을 투자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 관계자는 “신약 약가는 제약업체가 심평원 및 건보공단과 협의해서 결정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양쪽이 합의했기 때문에 약가가 결정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업계는 국내 신약 가격이 선진국의 4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50% 수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낮게 책정된 신약 가격은 수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약을 수입하는 나라들은 대체로 최대한 낮은 가격을 요구한다. 이때 한국 내 약가가 기준이 돼 신약을 수출해도 돈을 벌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 씨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선진국들은 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의미에서 자국 신약의 가치를 높여 잡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수출 여부를 고민하는 제약사도 있다. 역류성 식도염 치료제 신약이 완성 단계에 있는 B제약사가 그런 경우다. B사 관계자는 “해외에 있는 파트너 회사들이 ‘제발 한국 신약 약가를 정부에서 높이 받아 달라. 그래야 수출 단가를 높이 받는다’며 하소연하는 상황이다. 가격 책정 때문에 수출 계약이 늦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제약업계에서는 “연구개발과 신약 바람이 분 지금이 정책을 손볼 적기”라고 말한다. 한 제약사 임원은 “스위스 로슈가 한 해 57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것은 신약 때문”이라며 “신약 수출을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한 업체의 관계자는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 때문에 신약 약가를 낮추지만 국가경제 전체를 감안하면 약가를 높여 수출을 장려하는 게 옳다. 차라리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건강보험 재정을 지원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신약#가격산정제#제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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