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적은 여자?… “女후배 쑥쑥 키워줄 왕언니랍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 LCD 신화 이끈 삼성디스플레이 여성 과장 4인방

사실 기자는 직업 특성상 웬만해서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 때는 꽤 긴장이 됐다. 인터뷰 상대인 ‘언니’들의 기가 만만치 않아서였다.

4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삼성디스플레이 기흥사업장에서 만난 김소영(36·OLED사업부), 김경미(35·LCD사업부), 채윤희(33·LCD사업부), 김기옥 과장(38·OLED사업부)은 이 회사에서 ‘전설적인 언니들’로 통한다. 이들은 고교 졸업 직후 생산직으로 입사해 만 16∼21년째 근무해온 최고참이자 생산직 출신 첫 여성 과장들이다. 삼성디스플레이 여직원의 평균 근속연수가 7년 미만인 것을 감안하면 ‘독하게 버텨 살아남은’ 여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액정표시장치(LCD)산업의 신화를 만들어 온 주역이자 이제는 관리자로서 자신들을 꼭 닮은 여성 후배들을 길러내고 있는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삼성디스플레이 생산직 여직원들은 직장에서도 ‘언니’라는 호칭을 즐겨 쓴다.

○ 풀 뽑고 함바서 끼니 때우기도

김소영 과장은 전남 해남 출신의 수줍음 많고 말수 적은 소녀였다. 그는 1994년 고향을 떠나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는 나중에 삼성전자에서 독립)에 취업했다. 삼성그룹이 본격적으로 LCD 사업에 뛰어들 무렵이었다. 지금이야 국내 업체들이 세계 디스플레이업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당시에는 일본 업체들이 기술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1997년 말 특수사업부에 발령받은 김 과장과 동료 여직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아직 허허벌판이던 충남 천안사업장이었다.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라 회사는 인건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허허벌판 같은 공장 터의 잡초를 뽑았다. 직원 식당이 없어 공사 인부들과 건설현장식당(일명 함바)에서 끼니를 때웠다.

1998년 말 고생 끝에 본격적인 LCD 양산이 시작됐다. 주문이 밀려들었다. 모두들 자부심이 컸지만 체력이 달릴 때가 많았다. 채 과장은 “막내 때 하루 8시간을 서서 LCD 닦는 천을 접고 나면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밤이면 누워있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한창 때의 아가씨들인지라 화장도 하고 매니큐어도 바르고 싶었지만 ‘생얼’이 아니고서는 작업장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입사 당시 만 18세였던 김경미 과장은 “주말 출근과 잔업에 지쳐 사흘간 무단결근을 한 적도 있다”며 “돌아와서 언니들에게 욕도 많이 먹고 호되게 혼도 났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잘리지 않도록 온갖 핑계를 대며 감싸줬던 사람이 바로 언니들이었다”고 말했다.

○ 왕언니들의 카리스마

흔히 ‘여자의 적은 같은 여자’라고들 하지만 생산직의 94.3%가 여성인 삼성디스플레이에서는 얘기가 좀 다르다. 물론 ‘군기’가 세긴 하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여성이 많은 데다 사고 없이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면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불가피하다. 현장 반장 격인 ‘직장’을 맡고 있는 채 과장이 관리하는 여자 후배만 66명이다. 누가 다치지는 않는지, 사고가 생기지는 않는지 늘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언니’라는 호칭이 상징하듯 현장의 군기 속에는 끈끈한 자매애가 녹아 있다. 채 과장은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후배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데 나도 언니들로부터 노하우를 배웠다”고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월급을 고스란히 인천 집으로 송금해야 했어요. 작업장에선 그토록 무섭던 언니들이 내 형편을 어찌 알았는지 돌아가며 치킨과 호빵을 사주곤 했지요. 그땐 그게 그렇게 고마웠습니다.” 그는 이제 ‘맏언니’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후배 66명의 집과 기숙사를 일일이 방문한다. 갓 입사한 후배에겐 ‘100문 100답’식 프로필을 쓰게 한 뒤 꼼꼼히 외운다. 후배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혼내려면 기본적으로 관심과 애정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돈을 떼먹고 도망간 후배의 옛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대신 호통을 쳐주기도 한다.

언니들은 후배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입사 21년차이자 삼성디스플레이 최초의 생산직 여성 과장인 김기옥 과장은 얼마 전 오랫동안 공을 들여 온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 그토록 바라던 학사모를 쓴 것이다. 그는 지난달 사내대학인 백석문화대 사회복지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김 과장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 만삭의 몸을 이끌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게 때론 민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선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회사 최초의 여성 파트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내 뒤를 따라오는 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언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용인=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삼성디스플레이#여성 과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