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문고와 고려아연이 계열사로 있는 영풍그룹에는 영풍개발이라는 자회사가 있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의 장남 장세준 씨 등 자녀들이 33.3%의 지분을 보유한 회사로 그룹 계열사들의 건물 관리를 하고 있다. 대기업 통계사이트인 재벌닷컴의 조사 결과 영풍개발은 지난해 매출 132억 원 가운데 98%에 해당하는 130억 원을 내부 거래에서 올렸다. 18억6000만 원의 순이익을 내고 주당 3만 원씩을 배당금으로 지급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장녀와 차녀가 합해서 18.61% 지분을 보유한 식음료회사 롯데후레쉬델리카도 지난해 매출 584억 원 중 계열사끼리의 매출거래액이 569억 원으로 97.5%에 달했다. 이에 따라 2000년 37억 원에 불과하던 롯데후레쉬델리카의 매출이 설립 10년 만에 16배로 불어났다.
그룹 총수가 자식이나 친인척이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 편법으로 ‘부(富)를 대물림하는’ 행태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공정사회를 구현하겠다며 이 같은 편법적인 일감 몰아주기 행위에 세금을 매기겠다고 벼르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 ‘땅 짚고 헤엄치기’식 경영
정부가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방침을 밝힌 직후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일감 몰아주기는 과거의 일”이라며 “과세를 하면 비용이 올라가기 때문에 기업 경영활동에 위축되지 않도록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벌닷컴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토대로 자산순위 30대 그룹 가운데 총수 자녀들이 대주주로 있는 20개 비상장사의 실적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총매출 7조4229억 원 중 계열사 매출은 3조4249억 원으로 절반에 가까운 46%였다. 한 해 매출의 절반가량을 계열사들이 몰아줬다는 얘기다.
특히 부동산 관리회사, 시스템통합(SI) 회사, 건설사 등을 통한 일감 몰아주기 행태가 두드러졌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장남 허윤홍 씨 등 친인척들이 대부분의 지분을 보유한 시스템통합 자회사 GS아이티엠이 이런 사례다. 대기업 경영 행태를 연구하는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GS아이티엠은 2006년 5월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계열사 매출 비중이 평균 85%대였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이 회사들은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매출을 늘리는 게 아니라 계열사의 일감을 받아 매출을 올리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 ‘터널링’ 근절할 수 있을까
공정거래법 및 세법 전문가들은 대기업들의 이런 행태를 ‘터널링’이라고 부른다. 기업주가 자회사를 세워 자녀에게 물려준 뒤 일감을 몰아주는 것은 대표적인 터널링 사례다. 자회사를 물려줄 때는 증여세를 조금만 낸 뒤 추후에 그룹 일감을 몰아줘 회사를 키우면 세금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여전히 총수 일가들 사이에서 부를 대물림하는 방법으로 ‘애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해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35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1085개 계열사를 기준으로 내부 거래 유형을 분석한 결과 이처럼 지원성 거래로 의심해 볼 만한 사례가 41건이나 나타났다. 채이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부의 대물림은 고전적 수법이지만 그동안 당국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터널링 과정에서 대주주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착복할 가능성이 큰 만큼 적극적 과세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정부 8월까지 세법 개정안 마련
사실 정부도 이 같은 일감 몰아주기에 세금을 매긴 적이 있다. 공정위가 2007년 9월 현대자동차그룹과 글로비스에 국내 처음으로 물량 몰아주기와 거래가격 부풀리기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한 뒤 국세청이 부풀려진 거래가격을 손비(損費)로 인정하지 않고 법인세를 물렸다.
세제당국은 법인세 부과에 머물지 않고 증여세로 대처하겠다는 방침이다. 증여세 최고세율은 50%로 법인세율 22%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종전보다 진일보한 과세 의지를 밝힌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구체적인 과세 요건을 검토해 8월까지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채 연구위원은 “재정부가 다양한 일감 몰아주기 유형을 개정안에 반영하지 못하면 개정안 자체가 대기업들이 부를 대물림하는 우회 경로가 될 수 있는 만큼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터널링(Tunneling) ::
그룹 내 이익이 지배주주 지분이 낮은 기업에서 높은 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굴을 뚫어 회사 재산을 빼돌린다는 의미로 쓴다. 기업 오너가 자녀 이름으로 유망한 분야의 회사를 창업한 뒤 계열사를 동원해 이 회사의 성장을 돕고, 훗날 증시 상장을 통해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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