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휴대전화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삼성 휴대전화가 새로운 경험을 선물합니다." 지난해 12월28일 찾은 중국 베이징(北京)의 가전제품 대량판매점 '고미전기'(國美電氣) 매장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삼성전자 판촉사원들의 목소리로 생기가 돌았다.
중국은 신년 초가 본격적인 쇼핑 시즌이어서 대부분의 가전업체가 연말부터 판촉행사를 시작하지만 삼성전자는 훨씬 이른 12월14일부터 판촉에 들어갔다. 상당수 중국 소비자들 이 정초 2,3주 전 매장에 들러 '윈도우 쇼핑'을 하면서 살 물건을 '점 찍어' 둔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급부상한 중국이 글로벌 제조업체들을 중국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삼성전자도 예전에는 중국에서 제품을 만들어 대부분 해외로 수출했지만 지금은 중국에서 더 많이 팔고 있다. 삼성전자의 중국 매출은 미국 매출을 이미 넘어섰다.
● 세분화된 소비시장, 격화된 경쟁
계층별 소득분포가 심한 중국 시장은 선진국 시장과는 달리 소비층도 지극히 다양하다. 고급 제품을 잘 파는 회사도 보급형 제품에선 죽을 쑤는 사례가 적지 않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양문형 냉장고 등에서 중국 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발목이 잡힌 분야도 있다. TV 시장이 그랬다.
세계적으로 삼성전자 TV는 일본 소니를 제치고 TV 시장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니었다. 중국 현지 기업들이 삼성전자 제품 가격의 60% 정도에 TV를 만들어 시장을 휩쓴 탓이다. 지난해 10월말 기준 삼성전자 TV의 중국 점유율은 대형 제품인 46인치 이상 제품에선 1위였지만, 42인치 이하 중소형 제품 시장에선 하이센스, 스카이워스 등 중국 현지 업체들에게 밀렸다.
시장 진입 시점에는 적게 팔아도 많이 남기는 '프리미엄 마케팅'으로도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존재를 알리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중국 전자제품 시장 1위를 노리면서 이걸로는 부족해졌다. 시장점유율을 높여 더 많은 제품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원가를 낮춰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싸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절실했다.
삼성전자는 전략을 바꿨다. 프리미엄은 프리미엄인데 같은 가격대의 경쟁제품보다 '약간 고급'인 이른바 '확장된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중국 소비자를 아우르기 위해서다. 삼성전자 중국법인의 진연탁 가전사업부장은 "값싼 보급형 제품도 만들어 팔긴 하는데, 다른 값싼 보급형 제품보다는 조금 더 고급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 중국 유통망을 공략하다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제품 품질과 가격, 판촉과 유통망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시장에서 검증받은 좋은 품질의 제품과 프리미엄 브랜드를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유통망과 가격이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고미전기와 같은 가전 양판점을 공략했다.
우선 비슷한 구조의 양판점에서 위치 선정부터 차별화했다. 삼성전자는 양판점의 입구에 휴대전화 매장만 2, 3개 씩 설치했다. 중국 소비자들은 양판점을 찾으면 휴대전화부터 먼저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경쟁사 제품을 한 곳에 전시하지 않는 중국 유통업체의 특성을 감안해 한 곳에 TV와 백색가전 등의 제품을 몰아 전시했다.
중국 가전 양판점은 2005년부터 생겨나 최근 중국 가전제품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양판점 영업이 승부처라고 생각해 이곳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처럼 유통업체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했지만 정작 유통업체가 요구하는 가격 할인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가격을 지켜야 프리미엄 브랜드도 지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유통업체들도 이런 삼성전자를 반겼다. 양판점들은 타사 제품을 할인 판매해 매출 목표를 채우고, 그 뒤 삼성전자 제품을 제값에 팔아 이윤도 챙길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미국시장에서 베스트바이 등 전국 단위 가전제품 유통매장을 상대하면서 이런 판매 전략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생산혁신으로 경쟁력 확보
제품 판촉 유통망에서 성과가 나타났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경쟁력 있는 생산시스템이 있어야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29일 방문한 톈진(天津)의 삼성전자 발광다이오드(LED) TV 공장이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곳이었다. 이날 생산라인에서 TV를 조립하던 한 중국인 근로자가 갑자기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TV 조립대 위에 놓인 현황안내 모니터의 숫자가 '80'을 넘어서면서 빨갛게 변했기 때문이다. '81, 82, 83….' 빨간 숫자가 계속 등장했다. 결국 숫자가 89에 이르러서야 작업이 끝나 완성된 TV를 포장 라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80'은 TV 1대를 조립하는데 걸리는 '목표 시간' 80초다. 목표 시간에 맞춰 제품을 만들어야 그날 생산 목표를 채울 수 있다. 근로자를 옭죄는 비인간적 시스템처럼 보였지만 삼성전자 톈진 공장 직원들의 평균 근속년수는 5년이 넘는다. 1993년 공장이 문을 연 이후 16년 째 근무하고 있는 '원년 멤버'도 수십 명에 이른다. 근무만족도가 높다는 뜻이다. 라인을 좀 더 자세히 살피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 근로자 1명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TV 1대를 모두 조립했다. 한 줄로 늘어선 '컨베이어' 대신 작업 공간 단위의 '셀'에서 제품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삼성전자는 공장에 라인을 하나 늘리면 우선 단순한 컨베이어벨트부터 만든다. 새로 채용한 직원들은 이곳에서 단순 조립을 시작해 교육과 토론을 거치며 컨베이어를 스스로 셀 생산라인으로 바꾼다. 톈진공장을 총괄하는 김성식 중국삼성 화북지역 법인장은 "2008년 톈진 공장의 직원 1인 당 TV 평균 생산대수는 1분 당 3대였는데 2009년 1분 당 5대로 늘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삼성전자는 통합생산관리시스템(MES)을 통해 협력업체들에게 삼성전자의 생산량과 판매 예측량을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협력업체들이 부품 공급량을 조절하게 한 것이다. 이 덕분에 톈진 공장은 재고량을 사흘치 이내로 줄였다. 또 삼성전자는 유통업체가 특정 제품을 요구하면 48시간 내에 매장까지 제품을 배달한다. 2008년에는 72시간이 걸렸다.
중국삼성의 고양진 전무는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얼어붙은 선진국 소비의 대부분을 흡수하기 시작했다"며 "중국은 과거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글로벌 소비시장으로 부쩍 커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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