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은 기술규제, 선진국은 표준경쟁… 새 무역장벽 高高

  • 입력 2009년 4월 28일 02시 55분


《글로벌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결의가 있다. 자국산업 보호주의는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만큼 서로 장벽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하지만 각국 정상들의 “보호주의 철폐” 구호는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산업계는 지난해부터 오히려 각종 무역장벽이 더 높아진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수단을 동원하는 대신 기술규제나 국제표준과 같은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보호주의 장벽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21세기형 신종 무역장벽’이다.

구체적인 실행수단에 있어서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 차이를 보인다. 개도국들은 새로운 기술규제를 만들어 외국 수출 기업을 괴롭히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지난해 9월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등에서 일본공업규격(JIS) 인증을 이미 취득한 포스코의 철강제품에 대해 또 다른 인증을 요구하고 있다”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트집’을 잡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수출하기가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선진국들은 국제표준을 선점해 게임의 규칙을 자국에 유리하게 가져가려 한다. 국제표준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스스로 표준을 제정할 수 있는 강자가 되는 길뿐이다. 아직 정보기술(IT) 분야의 표준전쟁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새로운 인증 받아야”

■ 급증하는 기술규제

사전통보없이 인증 요구

추가비용-수출지연 피해

철강제품을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는 국내 중견기업인 A사는 올해 초 황당한 경험을 했다. 2년 이상 거래를 해 왔던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이 갑자기 새로운 인증을 요구한 것. 사전 설명이 없었고, 문제 발생 당일에도 어느 기관에서 인증을 받을 수 있는지 명시하지 않아 당혹감은 더 컸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 정부는 올해 2월 자국(自國) 인증제도인 인도네시아공업규격(SNI) 품목에 갑자기 열연재와 갈바륨 강판 등 2개를 추가했다. A사는 부리나케 현지 인증기관을 찾아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닷새 정도 철강제품이 세관 창고에서 머물러야 했다. 최근 이런 현상이 부쩍 늘어나면서 A사는 수출 지연으로 고생하고 있다.

○ 작년 기술규제 1251건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에 따르면 최근 A사와 같은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무역기술장벽위원회는 회원국들로부터 기술규제 정보를 받아 무역기술장벽(TBT) 건수를 발표하는데, 최근 이 수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2006년 875건이었지만 지난해에는 1251건으로 뛰었다.

지경부 기술표준원은 “기술규제를 내세운 국가에 상품을 수출하려면 그 국가의 기술표준, 시험 및 검사를 통한 적합성 평가 등을 통과해야 한다”며 “국내 수출기업들은 제품설계를 변경하는 등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데 혼란을 겪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역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공산품 전반에 기술규제를 새로 도입하고 있는 추세다. 지경부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에콰도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개도국에서는 공산품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규제를 새롭게 도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든 수입제품에 적합성인증서를 요구하고, 에콰도르도 대부분의 공산품에 대해 시험성적서와 적합성인증서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기존 규제를 강화해 나가는 추세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소비제품안전개선법’을 새로 제정하고 같은 해 11월부터 납 함유 페인트에 대해 규제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어린이용 제품 중 600ppm(0.6%) 이상의 납 성분이 함유된 제품을 판매 금지했다. 기술표준원은 현행 한국의 대미 수출 장난감 중 3분의 1 정도는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 유기적 정보공유 중요

WTO는 회원국이 기술규제를 만들 때 최소 60일 이전에 외국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개도국은 WTO에 통보 없이 갑작스럽게 규제 시행을 발표한다. 이 때문에 관련 정보가 빠른 자국(自國) 기업들에 비해 외국 기업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본다. 제품설계를 변경하거나 품질 수준을 향상시키는 과정에서 수출이 상당 기간 지연되기도 한다. 특히 정보기술(IT) 제품처럼 교체 주기가 짧은 분야에서는 문제가 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 3월 ‘보호주의 충격의 산업별 영향과 대응’ 보고서를 내놓고 “올해 환경 및 기술규제와 연계한 우회적인 방식의 보호주의가 강화될 것”이라며 “석유화학과 철강이 보호무역의 피해를 볼 주요 산업”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각국의 보호주의에 대한 종합적인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기업은 상시 모니터링 체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규제:

한 국가가 국내외 제품에 대해 일정 수준의 기술 및 품질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수입을 막거나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수출국은 기술 규제에 맞춰 품질을 보강하고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게임의 룰 선점하자”▼

■ 치열한 국제표준 전쟁

표준 인정 선진국 기업들

후발업체 쉽게 따돌려

2007년 말까지 한국은 동영상압축(MPEG) 기술 수십 건을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에 제출했다. 두 국제기구는 그중 25개를 국제표준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이 벌어들이는 돈은 얼마나 될까.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은 2021년까지 올릴 로열티 수입만 7980만 달러(약 1069억 원)로 추정했다. 여기에 외국 기업들이 MPEG 기술을 활용한 제품을 만들 때 한국에서 다양한 부품을 수입해 가게 된다. 또 MPEG 이용 제품이 국제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한국의 인증기관에 인증도 의뢰한다. 매번 한국 기업에 새로운 수익이 생긴다.

국제표준의 힘은 이처럼 크다.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 경쟁사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표준을 선점한 국가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이 국제표준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 한국의 수준은?

일반적으로 표준은 ‘공적 표준(Public Standards)’을 뜻한다. 즉 ISO, 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국제기구에서 표준으로 인정한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는 각국이 제품을 생산할 때 국제표준이 있으면 국제표준에 맞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ISO와 IEC를 합해 한국의 국제표준 제안 수는 2001년 7건에서 2008년 212건으로 늘었다. 한국은 주로 정보기술(IT), 전기전자제품, 기반기술 등 분야에서 국제표준을 여럿 획득했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가진 조선 분야에서 최근 국제표준 신청이 활발하다”며 “국제표준으로 등록되면 후발주자들이 한국의 모델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경쟁력 우위를 지속시킬 뿐 아니라 합법적 무역장벽도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때는 ‘사실상 표준(de facto)’이 된다. 사실상 표준 역시 기업들 사이에서 국제표준으로 인정된다. 선향 지경부 기술표준원 연구관은 “한국은 아직 국제표준 선진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근 국제표준 제안 건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각국이 합법적인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는 상황이어서 한국도 국제표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국제표준의 매력

국제표준을 선점하면 각종 인증 수입을 올릴 수 있다. 한국에는 300여 개의 시험기관이 있는데 지난해 이들 기관이 올린 수입은 약 3조4000억 원이다. 이 중 약 60%를 외국계 시험기관이 가져간다.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에서 제안한 국제표준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올해 3월 ISO는 한국 정부가 신청한 서비스로봇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평가기술을, IEC는 청소로봇의 성능평가 방법을 각각 국제표준안으로 채택했다. 이는 향후 로봇안전 가이드라인이 되고, 로봇 제품을 검사할 때 한국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에 따라 로봇 분야에서 새로운 시험 및 검사 수입이 예상된다.

로열티 수입도 크다. 2007년 말 기준으로 한국은 와이브로 기술 12건,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기술 4건을 국제표준으로 등록했다. 지경부 기술표준원은 2024년까지 와이브로 국제표준 기술을 통해 4780만 달러, 2020년까지 DMB 기술을 통해 980만 달러의 로열티 수입을 올릴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표준:

국제적으로 공인돼 후발 기업들이 따라야 하는 기술, 제조방식, 공정 등을 뜻한다. 각종 국제표준 인증기구가 인정한 ‘공적 표준’과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면서 얻게 되는 ‘사실상 표준’ 등 두 종류가 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