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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28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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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유통속도 5년來 최저… 정부 소비 진작책 시급
자동차 부품업체인 S사는 증시에서 ‘현금 부자’로 통한다.
이 회사가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86억 원으로 자본금(50억 원)의 1.7배 수준.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졌는데도 작년 하반기에만 35억 원이나 불어났다.
S사의 재무담당 이사는 “일종의 ‘재테크’ 차원에서 금리가 싼 무역금융으로 차입금을 늘려 현금을 모았다”며 “하지만 현재 대규모 투자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당분간 돈을 계속 쌓아두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돈이 한곳에 오래 머무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돈이 흐르는 속도가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27일 한국은행과 대신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10∼12월) 통화 한 단위가 거래에 사용된 횟수인 통화유통속도는 0.668로 추정됐다. 계절적 변수를 배제한 상태에서 통화유통속도를 측정하기 시작한 2003년 4분기 이후 가장 느린 것이다.
○ 쓰지도 않고 빌리지도 못하고
2003년 이후 0.710∼0.840 범위에서 등락을 반복하던 통화유통속도는 지난해 3분기에 0.703까지 하락했다가 4분기에 0.700 아래로 떨어졌다.
돈이 이처럼 더디게 도는 것은 현금을 많이 보유한 기업들이 돈을 풀지 않는 데다 현금이 필요한 기업에 대한 대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S사처럼 재무상태가 양호한 기업들이 현금을 축적하다 보니 작년 9월 말 기준 559개 상장기업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총 36조 원이나 됐다. 이들 상장기업이 보유한 만기 1년 이내 단기금융상품 투자액도 35조 원 정도였다. 지난해 10월 이후 상장기업들이 투자를 극도로 줄이며 보수적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현금 보유액은 여전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운전자금이 필요한 중소기업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국내 18개 은행이 중소기업에 대출한 자금은 422조4000억 원으로 1개월 전보다 1조8000억 원 감소했다. 은행들이 신규대출을 줄이고 기존 대출은 회수한 것이다.
올 들어 대출 규모가 다소 늘었지만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은 여전히 은행 문턱을 넘기가 어렵다.
○ 유동성 늘려도 꽁꽁…‘돈맥경화’ 심각
가계도 중소기업 못지않게 사정이 절박하다.
가구당 부채 규모가 지난해 4000만 원을 넘어서면서 돈이 생기면 빚부터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자동차 아파트 가구 등 값이 나가는 내구재를 사는 데 돈을 쓸 여유가 없다.
올해 초 정기예금이 만기가 돼 3000만 원을 손에 쥔 정모 씨(40·서울 양천구)는 은행 대출금 2000만 원을 먼저 갚았다. 나머지 1000만 원은 현금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초단기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었다. MMF 설정액은 올 들어서만 36조 원 이상 늘어 사상 처음 125조 원대를 넘어섰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목돈 투자를 꺼리고 있다. 대형마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윤모 씨(42·경기 고양시)는 최근 서울 시내에 커피숍을 차리려던 계획을 접었다. 부인이 “불황일수록 현금이 있어야 한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계약을 포기한 것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유동성을 늘려도 돈이 돌지 않는 ‘돈맥 경화’를 해소하려면 정부가 나서서 소비를 진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거시경제팀장은 “내구재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내리거나 중소기업의 운전자금 대출이 늘어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