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동유럽 경제]<상>헝가리 통화가치 폭락 현장

  • 입력 2009년 2월 23일 02시 54분


부다페스트=정위용 특파원
부다페스트=정위용 특파원
부도 도미노 위기 동유럽을 가다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발(發)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환율이 급등하고 해외자본이 빠져나가면서 일부 동유럽 국가는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동유럽 경제가 무너지면 이 지역에 거액을 투자한 서유럽 은행들은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 전체에 메가톤급 충격이 예상된다. 현지 취재를 통해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유럽 경제의 실상을 알아본다.》

구제금융 받고도 환율 최근 25% 급등

“넘치던 외화 블랙홀에 빠지듯 사라져”

정책 실패로 기업-가계 빚더미에 시름

실물 회생 난망… 외국기업 철수 잇따라

유로화 대비 헝가리 포린트화 환율이 300을 훌쩍 넘어선 21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시내 카롤리 거리. 주말을 맞아 쇼핑을 나온 시민들의 눈길은 길거리 환율 전광판에 쏠렸다.

환율이 폭등하자 집안에 있던 달러를 가지고 나와 환전소에서 ‘환율 흥정’을 하는 풍경도 등장했다. 부다페스트 근교에 사는 이스트 반 씨(37)는 “환전소에서 기준 환율보다 더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환율이 더 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물건 사재기 현상도 나타났다. 같은 날 부다페스트 남부에서 가장 큰 전자상가인 새턴 매장에선 종전 가격대로 판매하는 가전제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30m 넘게 줄을 서기도 했다.

매장 직원들은 “이번 주 포린트화가 더 떨어지기 전에 물건을 사두면 이익을 본다는 소문이 돈 뒤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부 제품은 할인행사 계획을 취소했고, 조만간 가격도 유로화 기준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환율 재앙’은 이미 헝가리 국민들의 삶을 조금씩 힘들게 하고 있다. TV에서는 정부가 연금개혁과 공무원 봉금 삭감 등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는 뉴스가 계속됐다.

▽블랙홀로 빨려가는 외화=그동안 헝가리에 대해선 자본주의 체제 전환과 유럽연합(EU) 가입의 가장 큰 수혜자라는 평가가 많았다.

서유럽으로부터 도로 및 도시 정비기금 지원이 잇따랐다. 수출과 함께 서유럽에서 일자리를 구한 헝가리 국민들의 본국 송금이 늘면서 2005년에는 동구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서방 금융기관들로부터 대거 들여왔던 자금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빠져나가면서 순식간에 헝가리 경제를 뒤흔든 ‘흉기’로 변했다.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한 달러화 뭉치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길을 가던 몇몇 시민은 답답한 나머지 기자에게 “넉넉하다던 외화가 어디로 갔느냐”라고 되물었다.

시내 안드레슈 거리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일부 시민들은 그 대답의 실마리를 짚고 있었다. 이들은 “이번 사태 원인은 금융정책의 실패”라며 정부를 겨냥했다.

정부는 외화 대출금리는 6% 내외로 그대로 두고 포린트화 대출금리는 12% 이상으로 대폭 올려놓았다.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과 EU로부터 25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이후 약속한 긴축정책에 따른 조치다.

헝가리는 외국자본의 추가 이탈을 막기 위해 포린트화 대출금리를 인상했지만 이런 이자율 격차 때문에 은행에서 외화대출을 받는 기업과 가계들이 급증했다. 환투기세력이 급증한 것이다.

시중에서 외화가 말라가자 포린트화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돈을 빌려줬던 외국 투자가들은 헝가리 시장을 아예 떠나거나 헝가리 정부 국채를 사들이는 등 돈놀이에 열중했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 초까지 유로당 230∼240포린트 대의 박스권을 유지하던 환율은 2월 16일 300을 훌쩍 뛰어 넘었다.

▽IMF 경고도 무시한 정부=헝가리 페렌츠 주르차니 총리의 갈팡질팡 정책은 외환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헝가리 정부는 지난해 12월 22일 인기영합정책이라는 IMF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구제금융을 연금과 공무원 월급 인상에 사용했다.

주르차니 총리는 지난해 12월 초까지만 해도 연금 개혁과 공무원 월급 삭감 등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국민의 30%가 연금 생활자인 헝가리의 연금 적자 규모는 외환보유액의 5%에 달해 재정적자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그는 연금개혁 계획을 며칠 만에 백지로 돌려놓은 것이다.

금융가에서 만난 한 외국인은 “헝가리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회생보다는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인기 정책에 몰두하는 한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폴트 가능성 증폭=위기상황 속에 정치적 리더십마저 실종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김종춘 KOTRA 부다페스트 무역관장은 “구제금융을 받은 후에도 가계 지원과 은행 지급 보증을 위해서는 헝가리에 추가로 125억 유로가 필요하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디폴트 선언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동유럽에서 성공적인 체제전환국으로 꼽혔던 헝가리가 디폴트를 선언할 경우 그 사태가 주변국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유럽 국가들은 촉각을 세우고 있다.

김 관장은 “환율 급등 이후 아우디와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외국기업이 조업을 중단하거나 공장을 폐쇄했다”며 “경제회생 전망이 나오지 않을 경우 헝가리 경제는 상당 기간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다페스트=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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