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다운로드만 없었더라도…”

  • 입력 2008년 11월 18일 03시 01분


구창모 씨는 “불법 다운로드가 사라져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건강한 미디어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구창모 씨는 “불법 다운로드가 사라져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건강한 미디어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매년 5월 미국에서 열리는 홈비디오사업부문 글로벌 총회에서 얼굴 붉힐 일이 이젠 없어요. 잘됐죠….”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 카페. 등산복 차림으로 앉은 구창모(45) 씨의 눈빛은 창밖 빗물처럼 어두웠다. 그는 10월까지 할리우드 영화사 소니픽처스의 한국 홈비디오사업부문을 총괄한 임원이었다.》

■ 외국영화사 한국직배 DVD사업 접은 구창모씨의 한숨

소니픽처스는 10월 말 한국 직배 홈비디오사업을 접었다. 연말 워너브러더스의 철수를 끝으로 외국 영화사의 직배 홈비디오사업부문은 모두 한국을 떠난다. 두 회사는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밝혔다.

10년 직장을 잃은 구 씨는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청계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함께 사는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 근황을 아는데…”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 2002년 이후 줄곧 내리막

구 씨는 1998년 소니픽처스(당시 컬럼비아트라이스타)의 마케팅 담당자로 영화 시장에 발을 들였다. 2001년 홈비디오사업부문 총괄 이사가 됐다. 7년간 출시한 영화 DVD는 고전영화 재출시를 포함해 1000편이 넘는다.

“시작할 땐 좋았어요. ‘매트릭스’(1999년)가 10만 장 넘게 팔린 뒤 DVD 수집 붐이 형성돼 있었죠. ‘블랙호크다운’(2002년) 3만 원대 디럭스세트 3만 장이 품절됐을 때는 우리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내리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어요.”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02년 이후 한국 홈비디오산업 매출은 줄곧 하향세였다. 2008년 예상 매출은 2002년의 40%. 세계 12개국 홈비디오사업부문 책임자가 모이는 연례 총회에서 구 씨는 갈수록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2001년 9위였던 한국 시장 규모는 2004년 최하위가 됐다. 대여점 수가 8년 전의 20%가 될 정도로 급격히 축소되는 상황에서 국내 DVD 생산업체도 어려움을 맞고 있다.

“영국에서 60만 장 넘게 팔린 대작 영화 DVD가 한국에서는 2만 장 정도 팔립니다. 브리핑 때 보통 도표 수치에서 천 단위 뒷자리 ‘0’을 생략해서 보여주는데 저는 늘 ‘한국 수치에는 생략된 0이 없다’고 설명해야 했어요. 농담처럼 웃어넘기는 듯했지만 제 속은 썩어 들어갔습니다.”

○ 다운로드 개선에 희망

최근 영화 수입사를 차린 구 씨는 “현장에서 갈고닦은 기량이 사업의 양분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의 폐해는 새 사업에도 치명적이다.

구 씨는 학창시절 비디오 대여점에서 누린 문화적 포만감을 영화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뜻을 함께 하는 많은 투자자들이 구 씨의 새로운 출발에 힘을 보탰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영화산업이 급격히 성장한 저변에는 1980년대 확장된 비디오 시장이 있었습니다. 미국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비디오숍에서 영화를 공부했다고 하잖아요? 다채로운 영화를 풍성하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한국의 타란티노’들을 만든 거죠.”

구 씨가 세운 영화사 '소서러'스 어프렌티스'는 주류 밖 작품성 있는 영화를 수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수익을 낼 수 있는 부가 판권 시장은 한국에서 궤멸 상태다. 유통 수익의 흐름을 좀먹는 불법 다운로드 때문이다.

저작권보호센터가 9월 공개한 ‘저작권 침해 방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웹하드나 P2P(개인 간 파일공유) 업체가 인터넷에서 불법으로 영화를 유통시켜 챙긴 수익은 5710억640만 원에 이른다. 이는 같은 해 한국 극장 총매출의 40%가 넘는 액수다.

이대희 고려대 법학과 교수는 “불법 다운로드가 DVD의 퇴장을 부추겼지만 무조건 소비자만 탓할 수 없다”며 “현실적인 가격의 적법한 영화 다운로드 시장이 이제 겨우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에 맞는 제도가 마련될 때까지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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