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생상품 남발한 ‘카지노 자본주의’ 결국 벼랑끝으로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불안한 ‘황소’ 16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월가 인근에서 관광객들이 강세장을 상징하는 황소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에 대한 미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이날 뉴욕증시는 변동성이 큰 하루를 보냈다. 뉴욕=AFP 연합뉴스
불안한 ‘황소’ 16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월가 인근에서 관광객들이 강세장을 상징하는 황소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에 대한 미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이날 뉴욕증시는 변동성이 큰 하루를 보냈다. 뉴욕=AFP 연합뉴스
■ ‘리스크’ 경시한 월가의 후회

투자은행들, 저금리 정책 편승해 무리한 차입투자

금융당국 감독 부실… 단기실적 집착 ‘도박’ 부추겨

주택시장 거품 빠지자 관련상품 감당못하고 몰락

최근 ‘월가(街)의 위기’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몰락이다.

지난해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촉발되면서 일부에서 나온 평가다. 이 같은 진단은 최근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다시 요동치면서 전 세계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경기침체로 수익성이 악화된 투자은행(IB)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자기자본 없이 남의 돈을 빌려 하는 투자(레버리지)를 감행했고 ‘첨단 금융공학’을 동원해 고수익을 보장해 준다는 파생상품을 만들어 냈다. 어느 누구도 그 위험이 무엇인지, 누가 위험을 떠안게 되는지 모른 채 시장만 팽창해 갔다.

10년 이상 곪아 온 위기가 이제야 터진 것은 저금리라는 진통제 덕분이었다. 경기 부양을 원했던 미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금리를 낮춰 유동성을 키웠고 이는 IB들의 투자 확대로 이어졌다.

탐욕에서 시작된 무모한 고위험 투자, 규제 완화를 금융건전성 감독의 방기로 착각한 미국 정부의 느슨한 감독 정책. 이 잘못된 조합은 전체 금융시장을 거대한 도박판처럼 만들어 세계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미국 등 각국의 금융 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금융 관련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었던’ 카지노 자본주의의 행태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가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 ‘금융공학 맹신’ 자업자득

IB의 가장 큰 무기인 파생상품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금융공학의 발달로 전성기를 맞았다. 뱅커들은 금융공학을 이용하면 금융상품의 위험도를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금융회사들은 ‘로켓 과학자’라 불리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출신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을 월가에 초청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학자들은 이론에는 능했지만 경제의 다양한 돌발변수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또 어떤 금융공학 기법도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 주지는 못했다. 수학자와 공학자들이 참여해 만든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그런 사례였다. 이들은 과거의 수익률 패턴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고 자부하면서 자기 돈의 수십 배가 넘는 투자를 감행했지만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예상치 못하고 1998년 파산했다.

최근 몰락한 IB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위험 분산을 한다며 금융기관의 모기지 채권을 한데 모아 리스크에 따라 잘게 쪼개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개별 증권의 위험은 분산할 수 있었지만 시장 전체의 위험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미국 주택가격 전체가 떨어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오자 속수무책이었던 것.

이들은 기초자산 하나를 놓고 수차례 유동화 증권을 발행했다. 경기가 호황이고 대출 상환이 잘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단 지급불능 사태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 통제 안 된 탐욕, 느슨한 정책

월가의 단기 실적주의와 지나친 성과 위주의 보상시스템도 금융위기에 한몫을 했다.

IB의 펀드매니저들은 위험한 투자를 해서 대박을 터뜨리면 엄청난 보너스를 받지만 큰 손실을 내더라도 최악의 경우 직장을 관두면 된다. 투자자만 쪽박을 차는 것. 이 때문에 ‘지르고 보자’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개연성이 크다. 한국투자증권 김범준 전무는 “IB에서는 대부분의 성과 보상이 1년 단위로 끊어져 있는 데다 실적이 뛰어난 사람 위주로 계속 인력 스카우트가 일어난다. 시장에만 맡겨둘 경우 고위험-고수익 경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고경영자(CEO)들의 리스크를 따지지 않는 독선적인 경영 스타일도 도마에 오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리먼브러더스의 리처드 펄드 CEO는 군대식 경영으로 자신의 경영방식에 대한 비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며 “이것이 호황기에는 경쟁사보다 발 빠르게 대처하는 계기가 됐지만 결국 불황기에 발목을 잡았다”고 꼬집었다. 메릴린치의 스탠리 오닐 회장도 부채담보부증권(CDO) 사업의 위험이 과도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임원들을 해고해 버렸다.

저금리가 너무 오래 지속된 것도 IB들의 무모한 도박을 부추긴 요인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000년대 초 10여 차례에 걸쳐 정책금리를 인하했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진 뒤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IB들은 수익률이 높지 않은 우량 채권보다는 채무상환 능력이 의심스러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손을 댔다. 한때 ‘마에스트로’라고 추앙받던 그린스펀 전 의장이 이번 사태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다 감독 당국은 탐욕 경쟁을 통제할 적절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이 같은 미국 금융시스템의 부정적 요소들은 ‘선진 금융’이라는 이름으로 각국에 수출됐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6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1929년 공황과 비교되는 이번 위기는 금융기관의 부정직성과 정책결정자의 무능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우수한 인재들(IB 직원들)이 경제의 효율성과 금융부문의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준과 규제를 회피하는 데 재능을 바쳤다. 그들은 너무너무 성공적이었고, 주택소유자 근로자 투자자 납세자인 우리 모두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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