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이전]70년대 이전계획 무산 배경

  • 입력 2004년 7월 6일 18시 54분


연기-공주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부에서 임시행정수도 최종후보지로 내정됐던 곳이다. 그러나 경제사정 등이 악화되면서 공주시 장기면과 연기군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기 지구’로 임시행정수도를 옮기려던 계획은 철회됐다.

70년대 수도 이전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에도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막대한 이전 비용, 국민경제의 악화, 수도 방위체제, 수도권 경제의 공백 등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내고 이후 서울시 시사(市史)편찬위원장을 맡았던 손정목(孫楨睦)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79년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미국의 카터 정부가 미군 철수를 거론하는 등 경제 군사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 재정긴축을 해야 했고 정부 예산을 수도 이전하는 데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며 “이런 이유로 박 대통령도 계속 ‘더 검토하고 보완하라’는 지시를 실무자들에게 내렸다”고 밝혔다.

국민경제가 전반적으로 내핍생활을 해야 할 형편인데다 만약 미군 철수가 이뤄지면 이를 메우기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했으므로 막대한 자원이 들어가는 수도 이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당시 임시행정수도 건설 투자비용으로 예상됐던 금액은 1982∼1996년 15년간 총 5조5421억원. 이 가운데 25%인 1조4046억원이 1982∼1986년 5년간 투자되도록 계획돼 있었다.

79년 정부 예산은 4조5338억원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임시행정수도 건설 초기 5년에 정부 연간 예산의 31%를 투입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담이 크다는 판단을 하고 계획을 강행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79년 10·26사태로 박 대통령이 숨지면서 당시의 수도 이전계획은 최종 무산됐다.

70년대 임시행정수도 이전계획 수립에서 무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현시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수도 이전 강행에 따른 경제적 압박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주한미군 감축 결정 등 안보적 변수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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