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첫 규제개혁위원 제프리 존스에 듣는다

  • 입력 2003년 4월 24일 18시 06분


《제프리 존스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 전 회장(51·사진)이 18일 정부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외국 국적의 인사가 한국 정부 공직에 진출한 것은 처음. 20년이 넘는 한국 생활과 5년여 동안 AMCHAM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법과 제도,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이달 초 AMCHAM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존스 위원은 규개위 위원 임명에 대해 “무한한 영광”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제 한국 ‘공무원’이 된 존스 위원을 24일 만나 소감과 노무현(盧武鉉) 정부 2개월에 대한 평가, 북핵 위기 해법과 노 대통령 방미 과제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최근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돌며 정재계 인사들을 만났는데 한국에 대한 미국 지도층의 인식은 어떤가.

“한국의 변화를 따라잡는 인식의 속도에 놀랐다. 과거 미국을 방문해 보면 한국의 정치 경제에 대해 적어도 2, 3년 정도 뒤떨어진 인식을 갖고 있어서 매우 답답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 느낀 것은 미국 지도층이 매우 현실적으로 한국을 평가하고 있으며 최신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미국 지도층의 주요 관심권 안에 들었다는 것은 한국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미국 정재계 지도층이 가진 가장 관심 있는 한국 문제는 무엇인가.

“북핵 이슈다. 뉴욕 방문길에 만난 씨티그룹 등 주요 기업 책임자들도 경제보다는 북핵 문제부터 물어봤다. 다음달로 예정된 노 대통령의 방미(訪美)사절단에 북핵 전문가들이 많이 보강돼야 할 것으로 본다.”

―초미의 관심사인 북핵 문제에서 노 대통령이 미국 정부와 합의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외교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보는가.

“노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입장은 미국에 매우 불안하다. 한국이 북핵 문제에서 미국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한다면 이는 커다란 ‘실수’이다. 노 대통령은 구체적인 대북(對北) 해법을 가지고 미국에 가야 한다. 지금과 같이 ‘북한은 남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인내심을 갖고 북한과 대화하자’ ‘미국도 우리(한국)와 같이 북한 문제를 해석해 달라’는 식의 주문은 미국 지도층에 통하지 않는다. 북핵 대응의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철저히 준비해서 미국측과 협의하지 않으면 노 대통령의 방미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미국의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이 한국에서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는데….

“미국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의 기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국은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북한의 위협을 보는 시각에서 한국과 미국은 너무 다르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변한 나라다. 북한의 테러 위협을 절대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가 미국 땅에 직접 떨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핵·미사일 개발 기술이 제3국으로 흘러들어가 6개월 안에 미국을 위협할 수도 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국내 안전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문제를 이 시각에서 보고 있다.”(그러나 그는 왜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한국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지 2개월이 됐다. 현 정부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는 어떤가.

“대통령선거 유세 당시 외국인으로서 걱정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노 후보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미관계, 외교관계, 대북관계에서 경험 부족으로 인한 발언을 여러 차례 들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투자자들과 만나 한국 대선에 대해 얘기할 때면 불안해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취임 후 경제정책이 안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외국인투자자들이 조금씩 안심하기 시작했다. 외교 정치 분야에서도 급진적 성향이 많이 희석되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외 평가가 좋아지자 노 대통령도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미-중 3자회담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에 대해 미국은 어떤 입장인가.

“한국은 미국과 북한간 대화를 오랫동안 희망해오지 않았는가. 지금 북한과 미국은 대화를 시작하는 단계다. 이번 회담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한국 내에서 불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당분간 불만을 접어두고 인내심을 갖고 회담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다자회담에 참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안될 경우 한국의 여론은 분열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북한이 바라는 것이라는 걸 미국은 잘 알고 있다.”

―올 1·4분기(1∼3월) 한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11억달러 정도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 가까이 줄었다. 외국인 투자가 빠르게 줄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첫째도 둘째도 원인은 북핵 사태이다. 정치적 리스크가 많은 나라에 투자자들이 몰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을 유망 투자처로 생각했던 외국 기업들은 막상 투자 결정을 못 내리고 있으며 이미 투자하고 있던 기업들도 투자를 줄여나가고 있다. 외국 기업인을 만나면 ‘북핵 사태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북핵 문제의 성격상 정확한 내용을 알기 힘들고, 아마 그래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더 커지는 것 같다. 북핵 사태 이외에도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도 전반적으로 투자자들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 최초로 규개위 위원에 임명됐다. 평소 한국의 행정규제, 경제규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었나.

“한국의 규제 시스템을 모두 다 알 수는 없고, 내가 규개위 위원에 임명된 것도 모든 규제를 총괄적으로 보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투자를 가로막는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찾아내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한다. AMCHAM 회장을 맡으면서 회원사들로부터 많은 불만을 접했다. 가장 큰 불만은 외환 관련 규제이다. 한국에 있는 외국 기업들이 돈을 내가고 들여오는 것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 기업 활동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세제 관련 규제도 외국인들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세금을 부과할 때 어떻게 하면 외국 기업에 편리하게 할까를 궁리하는데 한국은 가장 기본적인 이중과세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 해고를 어렵게 하는 갖가지 규제도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동북아 경제중심지’가 되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 둘러싸인 한국이 동북아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고 보는가.

“현재 아시아의 중심지로는 싱가포르와 홍콩이 있지만 그 중요성은 시들해지고 있다. 최근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여파로 이들 국가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중국, 한국, 일본이다. 일본은 10년여에 걸친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개혁이 지지부진하면서 외국인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중국이 경제 잠재력 면에서 한국보다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중시하는 것은 경제활동 자유도와 규제의 대상과 범위가 얼마나 분명한가 하는 점이다. 최근 헤리티지재단 조사에 따르면 경제활동 자유도에서 중국은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의 법규는 모호하고 관련 부처의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보다는 나은 편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기업은 지적재산권이 거의 보호되지 않아서 적절한 보상을 받기조차 어렵다.”

―현 정부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증권 집단소송제 허용, 지주회사제 도입, 출자총액제한제 강화 등의 조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규제개혁적 관점에서 이들 조치의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는가.

“지배구조의 투명성 측면에서 이런 조치들은 언젠가는 도입돼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시점에서 한국경제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북핵 문제를 해결해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한데 경제개혁부터 들고 나오면 외국인투자자들로부터 호응을 받기 힘들다. 재벌 개혁은 물론 필요하고 언젠가는 꼭 완수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아니라고 본다.”

―규개위 위원 생활에는 잘 적응하고 있는가.

“임명된 지 일주일 정도 됐는데 두 번 회의를 했다. 회의 내용이 너무 방대해 힘들지만 재미있다. 규개위에 나처럼 실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이 참석했으면 좋겠다. 규제로 인한 생생한 피해 사례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외국인이 공직에 임명된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김&장법률사무소에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외국기업 인수합병(M&A)에 관한 법률 절차를 처리하는 일이다. 규개위에서 투자 관련 법규를 만들고 개정하는 일과는 무관한 업무들이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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