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허승호/‘윤리경영’은 말뿐

  • 입력 2002년 9월 29일 19시 04분


‘나는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회사의 회계가 (어느 정도) 정확하다는 점을 맹세한다. 나는 (보수를 받은 대가로) 나와 동의한 감사 및 이사들과 함께 이를 점검했으며….’

( ) 부분을 빼고 위 글을 읽어보시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인터넷 사이트(www.sec.gov/rules/extra/ceocfo.htm)에 떠 있는 미 상장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서약서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8월 중순 커버스토리에서 서약서에 ( ) 안의 내용을 첨가해 미국 기업의 불투명성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엔론 사태 등으로 증시 붕괴를 우려한 SEC가 CEO들에게 서약서 제출을 요구하니 마지못해 서명은 했겠지만 실상이 어떤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빗댄 것이었다.

윤리경영 요구는 국내에서도 거세다. 전경련은 27일 주요기업의 윤리담당 임원 및 준법감시인으로 구성된 ‘한국기업윤리협의회’ 첫 총회를 열었다. 작년에 발족한 기업윤리임원협의회가 확대 개편된 것으로 기업은 물론 금융기업 학계 시민단체까지 참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름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국내의 유수한 CEO 10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CEO 포럼’도 한국CEO행동윤리강령을 선언하고 이달 중순 첫 콘퍼런스를 여는 등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들의 다짐대로 △투명경영을 실천하며 △주주를 최고로 섬기는 △올바른 기업지배구조가 확립되면 누가 가장 혜택을 볼까. 교과서적인 정답은 ‘주식을 제일 많이 가진 오너’다. 그러나 현실은 정답과 꼭 일치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그룹비서실에서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오너의 비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어. 비자금을 조성하려면 회사가 몇 배나 되는 손해를 보게 돼. 최대주주가 나머지 주주들의 돈을 훔치는 ‘일종의 절도’ 행위지.”

모그룹 비서실에서 일한 적 있는 기자의 친구가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좀 여유 있는 계열사의 돈을 빼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는 ‘선단식 경영’도 마찬가지다. 그룹 총수가 ‘여러 계열사의 경영권 유지’라는 개인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해당기업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배신하는 배임(背任)행위다.

최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받은 대출금의 행방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돈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갔다’는 주장과 아니라는 반박이 팽팽하다.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이 2000년 상반기 스스로 심각한 자금난을 겪으면서도 돈만 생기면 현대아산 현대중공업 현대건설 등을 지원해 4000억원에 가까운 돈이 계열사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 같은 지원의 부당성을 지적하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은 그룹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사임했다.

현대상선 문제의 중요한 한 갈래로 떠오른 ‘주주이익을 배신한 경영권자의 책임’ 문제가 이번에는 제대로 규명될 것인지 궁금하다.

허승호 경제부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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