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경쟁력이다]한국경제 '절반의 자원'이 버려져있다

  • 입력 2001년 12월 31일 16시 50분


《‘21세기 한국의 강대국 진입’의 꿈. 그 꿈의 실현은 한국 여성들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남성 중심의 사회체제에서 ‘미개발 인적 자원’이었던 여성인력을 잘 활용해야 우리 경제가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발전 측면뿐만 아니라 여성의 활발한 사회참여로 사회체제가 선진화되고 인권 신장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과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동아일보는 여성 인력 활용의 현실과 가능성에 대한 신년기획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직장 생활 7년째인 김영희씨(32·가명)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글 싣는 순서▼

- <上>한국경제 '절반의 자원'이 버려져있다
- <中>취업서 제외…승진서 낙오…
- <下>사회진출 발목잡는 보육정책

어떻게든 버텨볼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고 회사를 그만둘 것인가.

아침마다 탁아소에 두 아이 맡기고 출근하느라 ‘전쟁’을 치러야 했던 기억, 그 전쟁에 지쳐 친정 어머니에게 반강제로 애들을 맡긴 뒤 주말에 친정집 갈 때마다 느끼는 죄스러운 심정.

▼관련기사▼

- "한국 강대국 진입…여성의 손에"
- 차별없는 외국기업 '우먼파워'

남자 입사 동기생들은 물론 1, 2년 후배들까지 자신을 추월해 쑥쑥 커나가는 걸 쓴웃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모멸감. 전공인 경영학을 살려 기획이나 마케팅 쪽 일을 해보고 싶다고 늘 얘기했지만 ‘여자니까 부드러운 업무를 맡긴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번번이 무시당한 건 또 몇 번이었던가.

지난 7년은 그래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과 한숨의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이겨낼 수 있었다면 그건 대학시절부터 키워왔던 비즈니스 우먼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점 힘이 빠지네요. 이제 꿈을 그만 포기해야 할 때가 아닌지 두려워요.” 꿈을 접으려는 이 여성. 30대 이 여성의 좌절은 수많은 한국 여성의 낙심이자 눈물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 이 절반이 꿈을 잃는다면 한국도 꿈을 잃는다. 21세기 ‘강대국의 꿈’을 잃는다.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국은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지금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약점이다. 그러나 이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단한 강점이 될 수 있다. 이미 남성 인력의 활용(2000년 경제활동 참가율 93%)은 포화상태에 이른 현실에서, 묵혀 있던 고급 여성 인력을 활용하면 우리 경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인력 활용은 여전히 개도국〓20세기는 여성에게 위대한 성취의 시대였다. 참정권 획득, 피임약 발명 덕분으로 출산의 자율 조절 등 여성의 위상은 급격히 향상돼 왔다.

한국의 여성도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이제는 ‘우먼파워’의 위세를 얘기할 정도다. 창군 이래 최초의 여성 장군이 나오고 고시 합격자의 25%가 여자라는 점은 우먼파워를 상징하는 단면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빛나는 장면들 뒤로 커튼을 한 꺼풀 벗겨보면 거기엔 여성 인력에 관한 한 여전히 개도국 수준인 한국의 현실이 드러난다.

작년 한국의 대졸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55.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78.2%에 비해서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특히 고학력 여성의 활용률이 극히 낮다. 여성 취업의 ‘질’도 형편없다. 외환위기 이후 여성 근로자의 임시 일용직 비중이 한층 커져 여성 근로자 10명 가운데 7명꼴로 비정규직이다. 전체 여성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직급 면에서도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K그룹의 경우를 보자. 이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통틀어 임원은 300명가량. 그러나 이 많은 임원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요즘엔 매년 20% 정도의 여성들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니 세월이 흐르면 여성 임원이 탄생할 것이다. 현재 임원이 입사할 무렵엔 가물에 콩나듯 여직원이 입사했다.

SK가 특별히 여성의 승진을 막는 기업이라서가 아니다. 국내 대기업 어디를 봐도 여성 임원은 거의 없다.

임원까지 갈 것도 없이 대기업 여성관리자(과장급 이상) 비율을 놓고 봐도 개도국보다 낮은 수준이다. 40%를 넘는 미국은 논외로 치더라도 개도국인 필리핀(30%)이나 거의 20%에 육박하는 칠레 말레이시아 멕시코와 비교하면 4%에 불과한 한국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여성차별이 덜하다는 공무원의 경우, 여성 비율은 29.7%다. 그러나 문제는 직급과 직종에 따른 편중이다. 교육공무원이 전체 공무원의 51.2%를 차지하고 고용직의 40.8%, 별정직의 42.2%를 여성이 점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 공무원은 6급 이하 하위직이다.

우리 사회의 우수인력이랄 수 있는 석·박사 고학력 여성들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다. 전국여교수연합회가 작년에 조사한 결과 국내교수 4만3309명 중 여교수는 6111명으로 전체의 14.1%에 불과하다. 여자박사가 1980년 50명에서 2000년 1503명으로 20년동안 무려 30배가 늘어난 데 반해 여교수 증가율은 70년대 1.4%, 80년대 0.9%, 1990∼2001년 2.3%에 그쳤다. 놀랄만한 불균형이다.

여성의 지위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지표인 유엔개발계획(UNDP)의 여성권한 척도는 64개국중 61위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렇게 부끄러운 수치가 우리 여성 인력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을 거꾸로 뒤집어보면 여성 인력이 그만큼 개발 여지가 많은 ‘미개척 자원’이라는 걸 의미한다.

많은 경제전문가들도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을 여성 인력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 수석연구원은 “여성 인력은 우리 경제에 숨겨진 자원이다. 이젠 여성 인력을 남녀평등이라는 상징적 차원이 아닌, 방치돼 있던 인적 자원의 활용이라는 경제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구 사회는 이미 ‘여성 인력의 총동원체제’에 들어와 있다. 20세기 서구 사회의 성장도 여성들의 사회적 경제적 진출과 비례해서 이뤄졌다.

한국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그 시동을 걸려고 한다는 건 한편으론 뒤늦은 출발이다. 그러나 새로운 성장 엔진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우리 경제엔 도약의 바탕이 될 수 있다.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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