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동성위기]불씨는 '왕자의 난'에서…

  • 입력 2000년 5월 26일 19시 34분


현대건설의 자금난이 마침내 수면위로 떠올랐다. ‘현대발 경제대란’을 우려하는 소리마저 시장에 확산되고 있다. ‘대우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 전날 안정기미를 보였던 주식시장도 26일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정부나 채권단은 현대위기는 ‘신뢰의 위기일뿐 대우와는 사정이 한참 다르다’고 적극 진화에 나섰다.

현대는 ‘현대건설의 일시적인 자금수급 문제일 뿐 그룹 전체로 파급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못박았지만 시장은 현대가 기업지배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하고 있다.

▽위기는 ‘왕자의 난’에서 싹터〓지난해 7월 대우몰락이 기정사실로 굳어졌을 때 국내외 투자가들은 ‘다음 차례는 현대’라는 의구심을 가졌던 게 사실. 4대그룹중 부채비율이 가장 높았던 데다 인터넷 등 이른바 ‘오프라인 혁명’에 가장 어둡다는 평가 탓이었다.

현대는 작년말 부채비율 181%로 ‘200%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그러나 3월 말 정몽구-몽헌 회장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서 봉건적 경영의 구태를 드러내 국내외 투자가(주주)들에게 큰 실망을 줬다.

게다가 4월말 현대투신의 유동성위기가 대주주 계열사인 현대증권 현대전자로 불똥을 튀기면서 ‘탄탄한 그룹’이라는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최근 증시 및 채권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현대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본 금융기관들이 때마침 상환기일을 맞은 현대건설에 대해 차환을 기피, 자금난이 표면화됐다.

시장에선 대북한 지원자금의 규모가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불신감을 더 키웠다고 보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가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고 현대투신의 부실규모를 부풀려 선전하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건설만의 문제인가〓현대는 건설의 일시적 유동성위기가 그룹 전체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단언한다. 99년 말 국내 총 금융기관 차입금 32조9000억원중 회사채 장기차입금이 27조7000억원(84%)에 달해 당장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

현대 관계자는 “자금시장이 최근처럼 불안정하지 않다면 현대 유동성 위기론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관계자는 “19조원의 수주잔고를 자랑하는 국내 도급순위 1위의 현대건설이 흔들리는 것은 경쟁사 계열금융기관들의 무차별적 채권회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남의 탓’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은 이미 6000억원의 상환압력을 받고 있는 데다 다음달까지 추가로 3000억원 정도의 기업어음(CP)이 만기도래, 자금 수급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상황.

▽해결책〓건설 위기가 증폭돼 그룹 전체의 위기로 비화할 경우 가까스로 외환위기를 벗어난 우리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증시폭락은 물론 ‘현대채’에 물린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수조원대 부실을 떠안게 되고 공적자금 규모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현대의 문제를 신뢰의 위기로 규정하고 ‘문제해결도 신뢰성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용근 금감위원장이 지배구조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금감위 서근우 제2심의관은 “현대가 국내외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신인도가 있는 제3의 평가기관이 현대 계열사의 재무구조나 영업실태를 파악해 시장에 설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래정·박현진기자>ecopark@donga.com

▼이용근 금감위장 "차입구조 안정적…문제 없을 것"

이용근(李容根)금융감독위원장은 26일 현대의 자금문제는 건설 등 일부 계열사의 자금수급 불균형에 의한 것인 만큼 시장이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위원장과의 일문일답.

―현대의 자금문제가 심각한가.

“계열사 전체가 아니라 건설 등 일부 계열사에 자금수급상 미스매치(불균형)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건설 등에 외환은행이 일부 자금만 지원해주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

―현대의 부채구조에는 문제없나.

“장단기 차입구조가 안정적이다. 현대건설 자금난도 구조적인 것이 아니어서 500억원 정도의 지원만으로도 무난하다. 차입금은 만기가 다르기 때문에 한꺼번에 결제가 몰리는 것이 아니다. 현대 부채비율은 다른 4대그룹과 비교해도 낮은 수준으로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해도 4대그룹 중 부채비율이 가장 낮을 것이다.(이와 관련, 서근우 금감위 제2심의관은 현대의 전체 차입금 중 70%가 회사채와 기업어음이며 이중 50%는 만기가 긴 회사채여서 채무구조가 매우 안정적이라고 설명)

―현대의 지배구조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이번에 현대의 지배구조를 철저히 뜯어고칠 것이다. 어제(25일) 현대가 발표한 정주영명예회장의 지분정리만으로는 미흡하다. 앞으로 계열분리가 가속화되고, 자산매각 등으로 덩치를 줄이고,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있을 것이다. 정명예회장도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한다.” ―일부 중견그룹도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시장에서 알려져 있는데…. “일부 재벌그룹에 대한 자금난 풍문이 있으나 확인해본 결과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김경림 외환은행장 "500억정도면 유동성 해결"

김경림(金璟林) 외환은행장은 26일 오전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회장과의 면담을 마친 뒤 “현대건설과 상선은 일시적 자금난을 겪고 있을 뿐 펀더멘털에는 문제가 없다”며 시장의 현대관련 악성루머를 전면 부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현대건설의 현 상황은….

“시장에선 2차 부도설 등 각종 악성루머가 떠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해 6월말까지 당좌대출한도를 늘린 것이다.”

―상선도 어렵다는데….

“월 운임수입이 4000억원으로 문제가 없다. ”

―500억원이면 유동성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나.

“그렇다. 다른 채권은행에서도 추가 대출할 것으로 본다. 협조융자형식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 300억원 정도 되지 않겠나.”

―대우자동차인수 포기 등 구체적인 구조조정안을 제시했나.

“아니다. 하지만 어제(25일) 발표된 구조조정내용은 러프하지 않았나.”

―왕회장 퇴진을 요구했나.

“아니다. 알아서 할 일이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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