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살아야 금융이 산다]자생의지 박약한 금융권

  • 입력 2000년 2월 14일 19시 31분


일부 정부관계자는 정부의 금융시장 개입을 두고 “은행대출 청탁과 같은 과거의 관치금융과 달리 경제회생을 위한 ‘신관치금융’”이라고 항변한다. 현재 금융시장이 취약해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실제 금융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치를 자초할 정도로 금융시스템의 취약성과 후진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장창출 의지가 없다〓12일 투신권 신상품 개발을 논의하기 위해 투신사 실무자들과의 회의에 참석했던 금융감독원 실무자는 회의장을 나서면서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지난해 8월 13일 대우채펀드 환매제한조치 이후 이달 11일까지 투신권에서 70조원의 자금이 빠져나가 자금을 끌어오기 위한 신상품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이날 회의에서 투신사 실무자들은 별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투신권의 태도 때문에 최근 유일하게 자금유입이 되는 하이일드펀드와 후순위채담보(CBO)펀드 엄브렐러펀드 등은 모두 금감원이 주도해 상품 설계를 해왔다.

금감원 강병호(姜柄晧)부원장은 “신상품 개발에 앞서 수차례 상품설계를 할 것을 요구했지만 들고 오지 않으니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며 “이를 두고 관치금융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부관계자를 또 한번 경악하게 한 것은 지난해말 하이일드펀드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신권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현상. 수익률이 좋은 준투자 등급 이상 채권을 편입해 자금을 투신권으로 끌어들이고 회사채유통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나온 하이일드펀드에 부실채권을 편입하려는 시도가 포착된 것이다. 당시 투신권 내부에서조차 “부실채권을 무작정 편입해 어려움을 맞았으면서 또다시 구태를 재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한심스럽다”는 자조섞인 탄식이 나왔을 정도다.

▽책임 있는 결정 못 내린다〓지난 1년간 대우 관련 문제 협의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추진을 위해 금융기관간 수많은 회의가 개최됐다. 그때마다 은행 투신 등 금융권이 보인 모습은 ‘나만 살면 된다’는 기관이기주의였지 자체적인 합의 도출의 의지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실제 대우 워크아웃과 관련해 신규지원자금은 채권은행단이 합의한 규모의 10%를 이제 겨우 넘긴 상태다. 은행 최고경영진간에는 합의가 되었지만 각 은행 지점에서 집행이 되지 않고 있다.

면책특권까지 부여하며 신규자금지원을 독려하고 있지만 자신이 맡고 있는 동안은 어떻게 될지도 모를 기업에 신규대출을 할 수 없다는 보신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

금감원 관계자는 “워크아웃은 회생가치가 있는 기업을 살려 채권은행이 덕을 보자는 것인데 책임지기 싫어하는 모습만 보인다면 결국 공멸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채권은행은 워크아웃기업을 워크아웃 졸업, 워크아웃 지속, 퇴출 등 3단계로 분류하고 법정관리 및 화의기업 중에서 퇴출기업을 선정하는 작업을 3월말까지 마쳐야 하나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법정관리 기업을 청산하려면 이사회 결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부실여신이 늘어나 당장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냥 가는 것이 편하다는 분위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이용만(李龍萬)연구위원은 “은행이 부실기업을 제거할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데 당장의 손실을 두려워해 금융기관 본연의 기능을 방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금융권 공조해야〓금융시장이 망가진 것에는 분명 정부와 시장의 책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금융기관은 지금까지 미래분석이나 리스크관리 등 선진금융기법을 무시하고 금융거래를 해도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급격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과도기 상태에 와 있다.

현장에서 채권은행들과 워크아웃을 추진했던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이성규사무국장은 “채권금융기관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지는 중이지만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며 “그러나 금융기관의 변화만을 요구하기에 앞서 정부도 자율적인 영업이 가능하도록 일부 규정을 폐지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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