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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25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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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전말 ■
민씨 송환에 대해 현대와 북한측, 남북 당국자간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룬 시점은 24일 오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25일 중 민씨를 석방한다는 원칙만 합의됐을 뿐 민씨의 송환경로에 대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현대측은 합의 직후 북한측이 25일 오후 민씨를 석방할 것이란 사실을 정부에 긴급히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황원탁(黃源卓)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24일 낮 기자간담회를 통해 “주말경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공식 언급했다.
25일 오후까지 양측은 “장전항을 통해 데려가겠다”는 현대측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추방하겠다”는 북한측 입장이 팽팽히 맞섰으나 결국 현대측의 입장을 북한이 수용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됐다.
그러나 북한측이 밝힌 민씨의 석방발표 시점은 25일 저녁 늦은 시간이었고 북한방송이 오후5시경 당초 예상시간보다 앞당겨 석방을 발표하자 임동원(林東源)통일부장관마저 통일부 간부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석방이 빨라졌느냐”고 반가워했다는 후문이다.
민씨의 석방이 이처럼 돌파구를 찾은 것은 민씨와 북한조사기관 사이에 무언가 매듭이 풀렸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시각이다.
민씨는 당초 ‘귀순공작요원’임을 자인하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라는 북한쪽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북한도 민씨의 석방이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던 것이 24일 오전경 민씨와 북한 사이에 ‘적절한 타협’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막후채널 ■
민씨 송환을 위한 북한측과의 협상채널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베이징에서 열린 현대와 북한 아태평화위간의 공식채널이다. 다른 하나는 김보현(金保鉉)국무총리특보와 전금철(全今哲)아태평화위 부위원장간의 막후채널이었다.김특보와 전부위원장은 지난해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과 현재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 차관급회담을 성사시킨 막후 장본인. 당초 김특보가 베이징으로 급파됐다는 관측도 있었으나 김특보는 그동안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특보는 현대와 북한측간에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판문점을 통해 북한의 전부위원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통지문을 보내 민씨의 석방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베이징에서 김특보보다 급이 낮은 관계기관의 실무자들이 북한 아태평화위 실무자들을 직접 만나 우회적으로 ‘김―전’라인을 가동시켰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관계자도 “정부측 막후접촉채널은 복수로 보면 된다”고 말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정부는 민씨의 석방이 확인된 뒤에도 ‘김―전’라인이 막후채널로 가동됐다는 사실을 끝내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황수석에 의해 남북당국자간 막후접촉 채널의 존재가 확인된 뒤 정부관계자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주역 ■
민씨 석방에 가장 큰 공을 세운 협상의 주역은 과연 누구일까. 현대측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김윤규(金潤圭)현대아산사장이 핵심주역”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신뢰를 받고 있는 김사장이 협상의 전권을 쥐고 합류함으로써 타결이 빨라질 수 있었다는 게 현대측의 평가다.
그러나 협상의 최종단계에서는 현대측보다 정부 막후채널의 역할이 더 컸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김사장도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22일 통일부에 불려와 대북협상에 대한 정부측 지침을 전달받았다.
이 때문에 남북 정부당국자간 대화를 실무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김보현총리특보의 역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임동원장관도 민씨가 석방 직후 “지금으로서는 현대와 북한 아태평화위가 협상의 주역이었다고 말해야겠지…”라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