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사냥』…코리안이 다시 뛴다

  • 입력 1997년 12월 31일 18시 12분


팔수 있는 ‘천연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나라. ‘사람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아시아의 용’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나라…. 대한민국. 악몽처럼 그 용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지마저 내동댕이쳐진 것은 아니다. “살 길은 바깥에 있다. 나가자.”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상품보따리를 둘러메고 새해 첫 해외출장길에 나서는 젊은이들. 그들의 눈동자는 오로지 ‘잘 살아보기 위해’ 사막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아버지세대의 그것과 닮아 있다. 3일 중국 상하이 현지공장 주재원으로 떠나는 현대정공 해외사업개발부 임재혁과장(37). 맞벌이하는 아내와 다섯살배기 딸, 돌 지난 아들을 서울에 두고 떠난다. 짧아도 2년인 현지근무. “현지에서 로열티와 세일즈커미션으로 버는 돈은 전부 달러로 결제됩니다. 1달러라도 더 벌겁니다.” 입사해 12년간 수출부서에서 달러 벌어들이는 일만 해 온 임과장. 통근버스만 타며 수입의 절반은 저금해 왔다. “지난해 3.4분기만 해도 수출실적이 나쁘지 않았는데…. 분통이 터진다”는 임과장. 먼길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와 동생네 등 일가족을 모아놓고 “전깃불 하나라도 쓸데없이 켜지 말자”고 다짐했다. 달러폭등 이래 외환딜러 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온 LG전자 조리기기 수출팀 김성관과장(36). 변화된 시장상황에 대응할 마케팅전략을 세우기 위해 5일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한국에서 달러환율이 올랐으니 물건값을 깎자”는 중남미 수입선을 달래고 적정한 가격선을 책정하기 위해. “미국 빼고는 경기 좋은 나라가 없습니다. 장사를 하려 해도 시장자체가 위축됐으니 이제는 적어진 파이 중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워야 할 판입니다.” 김과장은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팀원들에게도 ‘어려울 때 마케팅다운 마케팅을 배울 수 있다, 자기교육을 강화하자’고 얘기합니다. 이번 위기를 잘 돌파하면 어떤 혼란상황에서도 의사결정을 잘 할 수 있을 만큼 개개인의 자질이 높아질 겁니다.” 3일 아침 우크라이나공화국 키예프로 출장을 떠나는 삼성전자 무선OA수출팀 안창규대리(33). 노총각 딱지를 떼고 싶어도 연애할 시간이없다.지난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어김없이 야근했고 새해가 되자마자 눈보라 몰아치는 러시아땅으로 금전등록기 시장현황을 살피러 떠난다. “연초에는 현지 거래선이나 해외바이어들도 휴가라 좀처럼 출장을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1.4분기 시장을 넓히려 떠납니다.” 러시아에서는 삼성전자의 금전등록기 시장점유율이 1위였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영향으로 한국경제가 위축되자 일본 경쟁사들의 저가공세가 예상돼 대응책 마련이 급해진 것. 경비절감으로 ‘현실화’한 출장비를 받아들고 한숨도 나왔다. 안전상 고급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는데…. “속이 편하기도 합니다. 총탄 지급받듯 부족한 달러를 받아 경제전쟁에 나가는 마당에 ‘호사’란 마땅치 않지요.” IMF의 서릿발도, 시베리아의 혹한도 이들의 말없는 전진을 막지 못한다. 〈정은령·박중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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