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 19]기업병페/오너 독단시스템이 문제

  • 입력 1997년 5월 21일 20시 08분


『왕권(王權)정치는 성군을 만나면 나라가 흥하지만 폭군을 만나면 민생이 도탄에 빠집니다. 신하들이 임금의 독단을 견제하는 신권(臣權)정치라야 백성을 파탄으로부터 구할 수 있습지요』 요즘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鄭道傳(정도전)은 왕권정치의 위험성을 이렇게 말한다. 이 드라마 작가 李煥慶(이환경)씨는 『과욕을 부리다 도산위기에 처하고서도 경영권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대기업 총수들은 왕조시대의 몰락한 폭군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재계의 왕권통치자」로 꼽히는 鄭泰守(정태수) 한보그룹총회장. 국회 청문회에서 『자금이란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아는가』라고 한 그의 「머슴론」은 독불장군식 경영스타일을 잘 말해준다. ▼ 직선적 사고…견제 못해 ▼ 한보는 그룹 덩치가 재계 14위까지 올랐는데도 자금에서 마케팅까지 정총회장이 직접 처리하는 「원맨쇼」 경영형태를 유지해왔다. 명절에 선물 보낼 명단까지 직접 챙기는가 하면 그룹의 돈은 친척 여사원 한두명에게만 비밀관리하도록 했다. 주변엔 심복들만 있을 뿐 전문경영인이 없었다.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공법 제철소에 6조원의 자금을 쏟아부으며 그룹의 명운을 걸 때도 자신의 로비력만 믿고 밀어붙였다. 金鍾國(김종국) 전한보재정본부장은 청문회에서 『정총회장의 무리한 명령을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정총회장은 은행측이 자금지원을 전제로 경영권 포기각서를 요구했을 때 『한보 회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경영진의 충고를 듣지 않고 경영권에 연연하다가 그룹의 공중분해를 맞았다. 과거에는 오너들의 독단이 기업성장의 원동력이었던 때도 있었다. 남다른 승부근성과 결단력, 돈 냄새 맡는데는 「머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너의 「스피드 경영」이 남긴 성공 신화도 적지 않다. 『60,70년대 공장설계도면 하나로 대형선박 몇척을 수주해내던 추진력이 한국 경제의 밑거름이었다. 모두들 안된다고 말리는 것을 이뤄내는 오너의 강력한 추진력에 감동할 따름이었다』(H그룹의 한 임원) 그러나 기업 규모가 방대해진 요즘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오너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다 무너지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93년 부도가 난 한양그룹의 裵鍾烈(배종렬)회장은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임원은 그 자리에서 정강이를 차기도 했다. 무리한 사업확장에 제동을 걸려는 경영진을 수시로 교체하고 현장에서도 기술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시공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신공법이 부실공사를 초래해 끝내 도산에 이르렀다. 라이프 우성 건영 유원 덕산 등도 하나같이 전문경영인이 없었던 기업. 대형 프로젝트를 오너 혼자서 불도저식으로 추진하다가 도산했다. 이에 대해 李定祚(이정조)향영컨설팅대표는 『기업주가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거나 자아도취가 심하고 사고가 직선적일 때 부도 가능성이 높다』며 『사내 견제장치는 경영진의 월권이 있으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대재벌그룹의 전문경영인들도 오너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삼성그룹이 뒤늦게 자동차사업을 시작할 때 그룹안에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아무도 「자동차광(狂)」으로 알려진 李健熙(이건희)회장의 뜻을 꺾지 못했다. 과잉투자 상태의 자동차업계는 내년 삼성의 시장진출로 더욱 심한 몸살을 앓게 될 전망이다. 현대그룹도 지난 78년 제2제철사업자 선정때 포철에 밀린 데 대한 鄭周永(정주영)명예회장의 「한」을 풀기 위해 20년간 일관제철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창업세대의 독선적 경영체제에서는 소유주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심복」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영속성을 가지려면 오너가 바뀌어도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는 전문경영인 시스템이 확보돼야 합니다』(金一燮·김일섭 삼일회계법인 부회장) 『아직도 재벌그룹들이 총수의 개인적 취향이나 독단적 판단에 맞추느라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지금은 기업 규모가 커진 만큼 오너중심의 의사결정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봅니다』(통상산업부 관계자) ▼ 규제-관치금융도 부채질 ▼ 오너의 독단 경영을 부추기는 요인도 많다. 각종 정부 규제는 경영보다는 로비에 능한 사업가를 양산한다. 사업가들은 로비를 통해 인허가권을 따내고 돈을 빌리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풍토가 오랫동안 온존했다. 대기업의 생사가 정권에 달려 있는 현실에서는 전문경영인의 합리적인 판단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라는 인식까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졌다. 章輝瑢(장휘용·경영학)인하대교수는 『정부의 허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규제 만능의 시대에는 사업권의 획득이 바로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너의 강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며 『정부 규제가 사라지지 않고는 오너의 독단경영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업 외부에서 독단을 막을 장치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한보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금융권이 기업의 신규투자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외부 입김만으로 거액을 대출해주는 관치(官治)금융 아래서는 오너의 독단적인 사업추진을 견제할 수 없다. 『기업이란 최종 결정자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갖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느냐에 성패가 달려있지요. 다만 오너의 비합리적인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소액주주보호를 강화하고 금융기관이 객관적으로 사업을 분석하는 등 사외 견제장치도 갖춰져야 합니다』(孔柄淏·공병호 자유기업센터소장) 〈이영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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