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를 기이하면서도 발랄하게 그리거나 묵직하고 강렬하게 담아낸 작품이 있다. 인생이란 여정에서 마음을 나눈 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완전히 다른 빛깔을 지닌 네 작품을 만나보자.
●뮤지컬 ‘비틀쥬스’ 악동 유령이 벌이는 기괴하고 유쾌한 소동
100억 년간 이승과 저승 사이에 낀 비틀쥬스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다. 외로움에 몸부림쳐도 어쩔 수 없다. 저승법에 따르면 산 사람이 비틀쥬스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그를 볼 수 있다. 비틀쥬스는 유령을 볼 수 있는 소녀 리디아, 동시에 사망한 부부 바바라와 아담을 만나자 이들을 이용해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만들려 하는데…. 팀 버튼 감독의 동명 영화(1988년)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2019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국내 공연은 2021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뮤지컬 ‘비틀쥬스’에서 외로움을 떨치려 몸부림치는 유령 비틀쥬스를 연기하는 김준수(가운데). CJ ENM 제공
기괴하면서도 엉뚱 발랄한 인물들이 자아내는 통통 튀는 이야기가 만화 같은 무대와 딱 맞는 톱니바퀴처럼 어우러진다. 악동 유령 비틀쥬스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노래와 춤,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이한 존재들,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거칠 것 없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지닌 비틀쥬스, 겁 없고 당차지만 세상을 떠난 엄마만 생각하며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리디아, 겁 많고 소심하지만 다정한 바바라와 아담을 통해 외로움, 삶과 죽음, 사랑을 그려낸다. 비틀쥬스의 과감하고 짓궂은 계략으로 인해 정 신없이 펼쳐지는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웃음이 터진다. 그러다 따뜻함이 밀려온다.
뮤지컬 ‘비틀쥬스’에서 유령을 볼 수 있는 겁 없는 소녀 리디아(홍나현·왼쪽)와 비틀쥬스(정성화). CJ ENM 제공
비틀쥬스가 수시로 랩처럼 쏟아내는 욕설 같은 막말도 우리말 운율을 살려 감칠맛(?) 나게 뽑았다. 뛰어난 기량을 지닌 배우들은 각 인물을 맞춤으로 연기해 빈 틈 없는 무대를 선사한다. 비틀쥬스는 정성화 정원영 김준수가 연기한다. 리디아 역은 홍나현 장민제가 맡았다. 바바라 역에는 박혜미 나하나, 아담 역에는 이율 정욱진이 발탁됐다. 리디아의 아빠 찰스는 김용수 김대령, 리디아의 자기계발 멘토 델리아는 전수미 윤공주가 연기한다. 3월 22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 14세 이상 관람 가능.
●연극 ‘벙커 트릴로지’ 참호에서 폭발하는 전쟁의 참상
제1차 세계대전. 곧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전쟁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입대한 영국인들. 함께 온 친구들이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서 참혹하게 숨지자 큰 충격을 받는다. 갑자기 시작되는 폭격,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이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1차 세계대전을 세 편의 고전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로 재해석했다. 작품 ‘모르가나’는 아서 왕 전설의 마법과 환영 속에서 병사들의 공포를 비춘다. ‘아가멤논’은 스스로 가정을 무너트리는 비극을 그렸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참호에서 극중극으로 재구성했다. 세 작품은 따로 봐도 무방하게 각각 독립적으로 그렸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모르가나’에서 솔저1 역의 이석준. 아이엠컬처 제공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벙커로 들어가는 것처럼 만들었다. 100여 석의 객석은 무대와 바로 맞닿아 관객도 벙커에서 병사들과 함께 숨쉬는 것 같다. 이들이 느끼는 공포와 절망, 분노가 온 몸으로 전해져 온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뿜어내 극강의 몰입도를 자아낸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맥베스’에서 솔저1 역의 최재웅. 아이엠컬처 제공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공개됐다. 국내에서는 2016년 초연됐고 2018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각 작품은 인터미션 없이 75분간 진행된다. 솔저1은 이석준 최재웅 박훈, 솔저2는 이동하 박정복 신성민, 솔저3은 문태유 김바다 김시유가 각각 맡았다. 솔저4는 정연 이진희 정운선이 연기한다. 3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16세 이상 관람가능.
●연극 ‘터키 블루스’ 음악과 여행으로 추억하는 우정
고등학생 시완과 중학생 주혁은 서로에게 영어와 농구를 가르쳐주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까워진다. 할 일은 꼭 하고 계획대로 사는 시완, 마음 가는대로 일단 지르는 주혁. 너무나 다른 둘은 서로를 통해 각기 다른 세상을 알게 된다. 터키를 함께 여행하자고 약속도 한다. 30대가 된 두 사람. 주혁은 혼자 터키로 떠나 시완을 생각한다. 시완은 주혁을 떠올리며 작은 콘서트를 연다.
연극 ‘터키 블루스’에서 주혁을 생각하며 작은 콘서트를 연 시완(김다흰). 연우무대 제공
연극 ‘터키 블루스’에서 터키 여행을 떠올리며 시완을 생각하는 주혁(전석호). 연우무대 제공 2013년 초연된 작품으로 청춘의 한 자락을 잔잔하게 그렸다. 시완 역은 김다흰, 주혁 역은 전석호가 맡았다.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한 계속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배우들이 터키를 여행하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과 무대 위 연기가 교차된다. 카세트 테이프, 가요 ‘왼손잡이’, ‘그대와 함께’ 등이 옛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둘은 각자의 공간에서 관객을 향해서만 이야기한다. 내면을 솔직히 털어놓기에 둘과 그 관계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김다흰은 직접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섬세하게 극을 이끈다. 전석호는 다소 거친 듯 하지만 감성이 충만한 주혁과 썩 잘 어울린다. 2월 1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14세 이상 관람 가능.
●뮤지컬 ‘슈가’ 살기 위해 ‘여자’가 된 이들의 좌충우돌
1929년 미국 시카고. 갱단이 살인하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 조, 제리는 갱단에게 쫓긴다. 색소폰 연주자 조, 베이시스트 제리는 살기 위해 여장을 하고 여성 밴드에 들어간다. 밴드는 마이애미로 향하고 조는 순수한 보컬리스트 슈가에게 반한다. 마이애미까지 쫓아온 갱단을 피해 도망쳐야 하지만 조가 슈가에 대한 사랑으로 머뭇거리면서 상황은 꼬여간다. 여장한 제리에게 나이 많은 억만장자 오스굿 필딩이 반해 버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뮤지컬 ‘슈가’에서 슈가 역을 맡은 솔라 양서윤 유연정과 조 역의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정택운(왼쪽부터). PR컴퍼니 제공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1959년)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국내 초연이다. 쇼뮤지컬로 화려한 춤과 연주를 시시각각 선보인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거듭되는 가운데 배우들은 안정적인 연기로 극을 이끈다. 조와 제리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빠르게 변신하며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슈가 역은 솔라 양서윤 유연정이 맡았다. 조와 그가 여장한 조세핀은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정택운이 연기한다. 제리와 그가 여장한 다프네 역에는 김법래 김형묵 송원근이 발탁됐다. 여성 밴드 리더인 스위트수 역은 김나희 류비가 맡았다. 오스굿 필딩은 김봉환 조남희가 연기한다. 2월 22일까지.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 대극장. 8세 이상 관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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