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회, 장터, 가드닝 클래스…한국의 정원문화 싹을 본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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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유럽에 살 때, 아이들과 정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싱허스트캐슬가든이나 그레이트딕스터가든 같은 유명 정원들도 다녔다. 그런데 정작 부러운 건 따로 있었다. 생활 속에서 누리는 정원이었다. 마을 곳곳의 가든센터에서 씨앗과 화분, 가드닝 용품을 고르는 그들의 ‘정원문화’에는 편안하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배어있었다.

아파트가 도시의 주거형태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에서 정원생활을 한다는 건 일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얘기일까. 경기 용인시 처인구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를 가보고 나서 국내에서도 정원문화가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 영국 리틀 칼리지에서 정원 디자인을 공부하고 서튼플레이스가든에서 일했던 전문 정원가 주례민 대표(43)가 이끄는 가든센터다.

경기 용인시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의 정원을 거닐고 있는 어느 가족의 모습.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경기 용인시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의 정원을 거닐고 있는 어느 가족의 모습.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800평 규모의 정원과 묘목농장을 갖춘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는 단순한 식물 매장이 아니다. 그 행보가 문화적이다. ‘음악소풍’이라는 이름으로 유리온실 안에서 클래식 공연을 열고, 전국의 솜씨 좋은 수공예인들을 불러모아 가든마켓’도 연다. 제주의 자연주의 패션, 천연발효 빵, 희귀식물, 수제 그릇, 퀼트 가방 등 정원생활에 어울리는 제품들이 햇살 좋은 야외정원에 펼쳐진다. 왜 그런일들을 할까.

지난달 열린 ‘오랑쥬리 음악소풍’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지난달 열린 ‘오랑쥬리 음악소풍’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식물을 키우든 키우지 않든 좋은 기억으로 저희 공간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공간과 식물에 대한 좋은 기억이 집 안에 작은 정원이라도 가꾸는 정원생활로 이어졌으면 해요. 아이들이 찾아와 벌과 나비를 볼 수 있는 ‘정원 경험’을 주고 싶어요. 국내 대학에서 원예학과를 나온 저는 영국에 정원 공부를 하러 가서야 ‘삶에 스며드는 정원’을 알게 됐거든요.”

이 곳은 계절마다 심기 좋은 식물들을 추천해 소개한다. 용인=김선미 기자
이 곳은 계절마다 심기 좋은 식물들을 추천해 소개한다. 용인=김선미 기자

‘음악소풍’이라는 이름의 정원 음악회는 학창시절 플룻을 연주했던 주 대표의 궁금증에서 비롯됐다. ‘정원과 음악이 만나면 어떤 시너지를 낼까.’ 프랑스 마을들이 와이너리에서 음악회를 열 듯, 영국에서는 가든센터에서 각종 공연이 열린다. 한국에는 아직 ‘가든센터’라는 이름도 낯설지만 30, 40대들이 주로 찾아와 식물과 호흡하며 클래식 공연을 감상한다. 2013년 제1회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실내정원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이니스프리’ 플래그십스토어 등 기업체와 주택들의 식재 등을 담당해온 주 대표는 말한다.

기업과 주택 정원 식재를 담당하는 동시에 가든센터를 운영하면서 정원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 주례민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대표.  용인=김선미 기자
기업과 주택 정원 식재를 담당하는 동시에 가든센터를 운영하면서 정원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 주례민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대표. 용인=김선미 기자

“바쁜 현대인들이 따로 시간을 내서 명상을 수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생활 속에서 머리를 비우고 집중하는 데 식물이 도움이 돼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요. 그런 식물의 위로는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자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우리 집 정원을 가꾸면 보는 사람도 행복해지고요. 정원에서 음악회를 열어보니 공연장보다 편안한 느낌이라 그런지 연주자와 관객 간 소통이 훨씬 잘 이뤄지는 것 같았어요.”

정원과 묘목장을 함께 운영해 누구든 방문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용인=김선미 기자
정원과 묘목장을 함께 운영해 누구든 방문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용인=김선미 기자

이 곳의 정원은 누구든 찾아와 천천히 거닐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계절 식물을 활용한 가드닝 클래스와 워크숍도 마련돼 있다. ‘널서리 위크’(Nursery week)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행사에서는 계절에 맞춰 곁에 둘 식물을 구할 수 있다. 가을을 맞는 정원에는 어떤 식물이 어울릴까.

큰꿩의비름과 수크렁의 조화가 시작된 가을정원의 모습.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큰꿩의비름과 수크렁의 조화가 시작된 가을정원의 모습. 정원생활바이오랑쥬리 제공

“지금 심어서 올해 가을과 내년 봄을 즐길 수 있는 식물을 추천드려요. 큰잎꿩의비름 ‘스타더스트’와 ‘오텀조이’는 가을 정원을 풍성하게 만들어줘요. 보라색 꽃이 층층 피어나는 층꽃나무는 생장 속도가 빠르고요. 쑥부쟁이와 등골나무, 누린내풀 ‘스노우페어리’는 정원에 존재감 있는 포인트를 줍니다.”


가을 정원에 풍성함을 더해주는 큰꿩의비름.  용인=김선미 기자
가을 정원에 풍성함을 더해주는 큰꿩의비름. 용인=김선미 기자

정원 카페를 겸한 이곳에는 단정한 디자인의 호미와 정전 가위, 꽃과 과일이 그려진 티 타월과 머그컵, 실내에서 키우기 좋은 식물들이 있다. 층고가 높은 유리온실에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배경음악과 식물이 어우러져 언젠가는 정원을 가꿔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래서일까. 인스타그램에서는 1만2000명의 팔로워들이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정원의 소식과 문화를 접한다. 식물을 대량으로 팔지만 라이프스타일로는 접근하지 않았던 한국의 화훼공판장들이 참고할만한 지점이다.

꽃과 과일이 프린트된 티 타월 등 정원생활에 어울리는 제품들이 소개된다. 용인=김선미 기자
꽃과 과일이 프린트된 티 타월 등 정원생활에 어울리는 제품들이 소개된다. 용인=김선미 기자


주 대표가 생각하는 정원 생활이란 뭘까.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차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정원생활이라고 생각해요. 손바닥만한 정원이든, 바질을 키우는 아파트 베란다든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곧 ‘시크릿가든’이니까요. 정원 일은 고된 노동으로 하지 말고 내가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기왕이면 예쁜 앞치마와 장화 차림으로 일하다가 꽃 몇 송이 꺾어 병에 담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세요. 정원이 없다고요? 집 근처 정원이나 공원에서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걷다가 가만히 앉아보세요. 중요한 건 일상에서 정원을 즐기는 마음이니까요.”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온실 매장 내부. 용인=김선미 기자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온실 매장 내부. 용인=김선미 기자

우리가 ‘정원문화’라고 불러주지 않았을 뿐,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정원문화가 있었다. 땅만 있으면 메리골드나 채송화를 심은 미학의 민족이 한국인이다. 텃밭에 상추나 고추를 심고 이웃과 나눈 문화는 유럽의 ‘키친 가든’ 문화에 뒤지지 않는다. 흙을 밟지 않고 디지털 기기와 한 몸으로 자란 지금 세대에게야말로 식물의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닐까.

주례민 대표는 “정원일은 너무 고되게 하지 말고 예쁜 앞치마 입고 즐길만큼만 하라”고 말한다. 용인=김선미 기자
주례민 대표는 “정원일은 너무 고되게 하지 말고 예쁜 앞치마 입고 즐길만큼만 하라”고 말한다. 용인=김선미 기자

주 대표는 말한다. “일에 지치고 마음이 힘들 때 화단의 잡초를 뽑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정원 속에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영국에서 일할 때, 중장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부부들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원이 제게 준 선물은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어요. 그런 행복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가을정원에는 여름의 수국이 지고 가을 장미가 그라스와 어우러진다. 용인=김선미 기자
가을정원에는 여름의 수국이 지고 가을 장미가 그라스와 어우러진다. 용인=김선미 기자


주례민 대표가 전하는 ‘스몰 가드닝’ 팁
1. 나무 재질의 와인 박스를 활용하라.
물이 잘 빠지도록 배수판과 난석을 충분히 깐 뒤 채소를 심으면 빈티지한 느낌의 샐러드 채소 가든이 된다.

2. 다육식물은 모아 심어라.
다육식물은 돌로 만든 화분과 잘 어울린다. 다육식물 몇 개를 둥그런 돌 화기에 심고 자갈과 가는 모래를 더하면 미니 암석원이 만들어진다.

3. 식물이 모여 사는 화단을 만들어라.
야외정원이 있다면 한곳에 장소를 정해 식물을 모아 심어라. 목재나 벽돌 등으로 화단을 구분하라. 힘들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정도의 면적만 정원으로 가꾸면 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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