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경 하려다 그림의 포로가 된 컬렉터 이야기[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5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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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홍 작품 지켜낸
두 컬렉터 이야기

원계홍,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 1979년, 캔버스에 유채, 46×53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안태연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두 컬렉터의 놀라운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오전, 성곡미술관에서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린다고 해 찾아갔습니다. 원계홍은 생소한 작가였기에, ‘그림이 어떤지 보러 갈까?’하는 생각이었죠.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1978년 55세 나이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가졌지만, 2년 뒤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며. 세상과 잘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가의 작품을 33년 만에 다시 관객과 만나게 해 준 것은 두 컬렉터,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과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이었습니다.

원 화백의 그림이 빛을 보기까지는 세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원계홍 화백의 두 소장자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왼쪽)과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두 사람은 김 교수님이 원계홍에 관해 쓴 블로그 글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함부로 흩어지면 안 되겠다”
첫 번째 만남은 1984년 인사동 공창화랑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은 “좋은 전시가 있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원계홍 화백의 유작 전시를 가게 됩니다.

“첫날 가서 본 뒤로 일주일 내내 매일 그림을 보러 갔죠. 하루하루 지날수록 눈이 더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 분은 함부로 흩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 회장은 큰마음을 먹고 원 화백의 부인을 찾아갑니다. “경제가 허락되는 대로 그림을 다 사겠다. 나중에 원계홍 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했죠. 당시 원 화백의 부인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 그림을 내놓긴 했지만, 남편의 흔적을 내놓아야 하는지 많이 망설였다고 합니다.

원계홍, 수색역, 1979년, 캔버스에 유채, 45.5×53.2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결국 윤 회장이 세 차례 정도 제안을 했지만 끝내 원 화백의 부인은 고사했습니다. 윤 회장은 원 화백의 그림 10여 점을 소장하는 데 그쳤죠.

그러나 크라운제과 대표이사를 하던 시절이어서 그의 작품으로 달력도 만들었습니다. 윤 회장은 “몇천 부를 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음 해 또 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장안평 고미술상가에서 원 화백의 그림을 발견한 적도 있습니다.

“프레임도 없이 수백 점 그림이 엘피판처럼 쌓여있는데 그 사이에 원 화백 그림이 있었어요. 그때 느낌이 참 슬펐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윤 회장은 잠시 울컥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답니다.

원계홍, 정물, 1975년, 캔버스에 유채, 31.3×40.5cm, ⓒ원계홍기념사업회

집구경 하려다 그림의 포로가 되다
두 번째 만남은 1989년 봄 부암동입니다. 이때 김태섭 전 교수는 세검정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시간이 남아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 복덕방에 잠시 들렀는데 주인의 권유로 집을 보러 가게 됩니다.

“집 사러 온 게 아니라고 했는데, 안 사도 괜찮으니 주인이 구경만 하라고 해 따라갔죠. 그래서 지금 자하손만두 근처의 집에 갔는데 사모님은 마루에 앉아 계시고, 방문을 열었는데 문간방에 작품이 한가득 쌓여 있더라구요.”

그림을 봐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김 전 교수는 ‘여태까지 본 것과 전혀 다른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화가였지만, 그는 “집보다 그림이 훨씬 좋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그림이 인화된 사진을 2~3일 보고 다시 돌려달라며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원계홍, 장충동 1가 뒷골목, 1980년, 캔버스에 유채, 65×80.6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그는 집으로 돌아와 밤새 사진을 살펴봅니다. 보고 또 봐도 너무 좋은 그림이었고, 고민 끝에 집과 그림 약 200점을 모두 인수하기로 합니다.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 잔금을 마련하는 데 2년 넘게 걸렸고, 경제 상황도 어려워져 한동안 고생했답니다.

그런데 1990년엔 공간화랑에서 ‘원계홍 10주기 추모전’까지 열었죠. 김 전 교수는 “그분 작품에 눈이 멀어 포로가 됐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부암동 집에 살고 있는 김 전 교수는 “방 네 칸짜리 집에서 한두 칸은 그림 차지였다”며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학교 갈 때까지는 앞집 방 세 칸을 빌려 공부방으로 썼다”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림을 지켜온 데에는 원 화백의 부인과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부탁이 큰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사모님은 한국에 오면 저희 집에서 가족처럼 지냈어요. 이경성 전 관장은 ‘작품은 팔지 말고 잘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했죠. 그분들의 말씀으로 견뎠습니다.”

원계홍, 장미, 1977년, 캔버스에 유채, 34.5x26.5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오로지 그림을 매개로 연결된 사람들
세 번째 만남은 약 10여년 전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졌습니다.

원 화백에 대한 애정을 꾸준히 갖고 있었던 윤영주 회장은 가끔씩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고 합니다. 아무리 검색해도 아무 내용이 없다가 어느 날 원계홍의 작품 사진과 글을 발견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윤 회장은 댓글을 달았습니다.

‘제가 작품을 좀 가지고 있고, 저는 원 화백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를 아셨나요?’

그러자 김 전 교수의 따님이 윤 회장에게 연락을 했고, 윤 회장은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 화백의 유작을 그가 모두 넘겨받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됐죠.

그러다 최근 김 전 교수가 ‘100주년이 되었는데 뭐 좀 해드려야죠’라고 했고, 윤 회장도 “그렇다면 한 번 뜻을 세워봅시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원 화백의 그림을 한 자리에 모아 33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만나기 전 또 한 번 연결이 있었답니다.

김 전 교수님은 1989년 원 화백의 작품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뒤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는 놀라며 “아니 무슨 그림이길래?”라고 물었죠. 그러나 이름도 생소한 작가였기에 김 교수는 말없이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답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거 크라운제과 달력에서 본 그림인데. 그때 내가 인상 깊게 봤어.”

김 전 교수는 ‘이때 이미 윤 회장이 만든 달력의 덕을 봤다’며 웃었습니다.

원계홍, 꽃(글라디올러스), 1974년, 캔버스에 유채, 58.3x44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이 전시에서 제 마음에 와닿은 것은 그림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연결될 수 있고, 그중 많은 경우는 이해관계가 차지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름 모를 작가가 남긴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됐다는 이야기가 참 따스하게 다가왔습니다.

생전 원 화백은 사람들과 교류를 꺼리며 작품만 했고, 때때로 이것이 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림의 포로가 되었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죠. 또 전혀 모르던 사람을 ‘감동’이라는 연결고리로 끈끈하게 맺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 힘은 ‘이 작품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또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의지로까지 이어졌고요.

이렇게 무작위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구나,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저도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전시장에서 그러한 힘을 직접 한 번 만나보세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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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의견
(지난주 광주비엔날레 이숙경 감독 인터뷰에 관한 의견입니다)

■ 현대 미술 작가와 깊은 연을 나누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숙경 감독님의 말씀 중 ‘세상을 떠나려고 미술을 하지 말자. 미술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대하지 말자는 거죠. 예술이 돈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서 하는게 아니잖아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라는 구절이 맘에 와닿습니다.
가장 왕성하게 세상과 소통해야 할 대다수 작가가 자의든 타의든 단절에 가까운 작업 활동을 합니다.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레지던시 한 번 입주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작가 분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생기길 바랍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작가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조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저도 사실 저 말이 가장 마음 깊게 다가왔는데 역시 미술에 애정을 가진 분들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나봅니다. 오늘 원계홍 화백의 이야기도 남다르게 보셨을 것 같아요. 작가들의 현실도 기회가 되면 꼭 다뤄보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 갤러리나 뮤지엄에서는 보기 힘든 과감한 큐레이션의 전시와 메시지에 충실한 작품을 볼수 있어서 좋아해요(고준환)
☞ 그렇죠! 사실 요즘은 비엔날레도 상업화가 되어서 그나마 기댈 곳이 뮤지엄인가 싶을 때도 있긴 합니다만 비엔날레에게 보통 기대하는 바는 말씀하신 부분인듯합니다.

■ 들어는 봤지만 뭘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건 전혀 없었어요. 인터뷰 내용처럼 아트 페어나 비엔날레 등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게 딱 제 얘기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예술 생태계에 대한 뉴스레터도 받아보고 싶습니다! 이 외에 감동받은 포인트가 하나 있었는데요, 세상을 떠나려고 미술을 하지 말라 세상과 미술이 다른 것이 아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지 않냐는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네요.
☞ 역시 같은 부분에서 감동 받으셨군요!! 기쁩니다. 그리고 예술 생태계에 관한 내용도 좋은 기회에 꼭 다뤄보겠습니다. :)

■…그렇지만 그냥 척 봐서 좋은 게 현대미술은 아니에요…
☞ 공감의 의견인가요 ㅎㅎ 사실 저는 약간의 경험과 열린 마음만 있다면 현대미술이 오히려 과거의 것보다 더 척봐도 좋은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 오늘 글을 읽으며 기대감에 벅차오릅니다. 앞으로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실지. 이번에는 꼭 내려가서 볼 생각이예요. ‘유약어수’. 지금 시대와 사회에 흐르고 스며들면 좋겠다 느끼기에 더욱 기다려집니다.(felix)
☞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소식들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현대미술은 맥락을 봐야할 때가 많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주의적인 작품만 전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들이 담고 있는 심오하고 깊은 문제를 희석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미술이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말씀에 특히 공감이 갑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는 비엔날레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과거 관람한 좋은 기억이 떠올라요


김민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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