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땐 ‘내 소리 대단하지’라며 내질렀는데… 이젠 추리닝 입고 바나나 물고 귀가하는걸 꿈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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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앓이’로 3년간 무대 떠났다 돌아온 이자람, 최근 에세이 펴내
‘브레히트 희곡’ 판소리로 재해석, 해외 반응 폭발속 ‘소리앓이’ 엄습
청력 잃고 죽음의 공포까지 느껴… 공백기동안 ‘영화같은 삶’ 되돌아봐
작창가-밴드보컬-작가 도전 이어 ‘판소리하는 소시민’ 영화 만들고파

약 3년의 공백을 깨고 2019년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 무대로 돌아온 이자람. 두산아트센터 제공
약 3년의 공백을 깨고 2019년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 무대로 돌아온 이자람. 두산아트센터 제공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판소리에 빠져 힘든 줄 모르고 달려왔다. 1997년 18세에 ‘심청가’ 4시간 완창에 이어 이듬해 ‘춘향가’ 8시간 완창에 성공했다. 최연소, 최장 시간 춘향가 완창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 후 1년간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공연을 이어갔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희곡 ‘사천의 선인’과 ‘억척어멈과 그 아이들’을 재해석한 창작 판소리 ‘사천가’와 ‘억척가’로 주목받으며 미국, 프랑스, 호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러다 2017년 사천가와 억척가를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며 3년 가까이 무대를 떠났다. 그는 2019년 11월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통해 무대로 돌아왔다.

소리꾼으로 록 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인 이자람(43)의 삶은 영화 같다. 영광과 고통이 교차한 삶을 되돌아본 에세이 ‘오늘도 자람’(창비)을 15일 펴낸 그를 최근 만났다.

2007년 초연한 사천가는 뚱뚱한 ‘순덕’이 외모 지상주의와 싸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2011년 초연한 억척가는 위촉오 삼국시대에 전쟁을 겪은 여인의 삶을 다룬다. 해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브라질 상파울루 극장의 한 프로듀서는 공연 후 무대에 올라 존경의 뜻으로 그의 구두에 입을 맞췄다.

소리꾼 이자람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는 곳이 어디일지 상상하는 훈련을 매일 한다. 그는 “수 km 떨어진 남산타워까지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지, 10m 앞 사람에게만 전하고 싶은지에 따라 소리 길이를 조절하는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소리꾼 이자람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는 곳이 어디일지 상상하는 훈련을 매일 한다. 그는 “수 km 떨어진 남산타워까지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지, 10m 앞 사람에게만 전하고 싶은지에 따라 소리 길이를 조절하는 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프랑스 파리에서 첫 사천가 공연 때 유명 연극배우가 막이 내린 뒤 찾아왔어요. ‘출연자가 마리오네트(꼭두각시 인형)가 되기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더라. 이런 식으로 브레이트 작품을 재해석하다니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더군요. 내레이터와 등장인물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판소리에 충격을 받은 거죠.”

이자람은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 이상이 오는 ‘소리앓이’를 겪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인해 오른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고, 무대에서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는 것.

“억척가 공연 때 2시간 40분 동안 몰아치는 장단에 쉼 없이 음역을 바꿔 가며 전쟁터의 장군과 군인, 자녀를 잃은 어머니 등을 연기했어요. 무대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계속 노래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죠.”

그는 2019년 복귀까지 약 3년의 공백기 동안 자신을 찬찬히 돌아봤다. 그는 “어렸을 땐 ‘내 소리 대단하지?’라며 무조건 내질렀다. 그런데 긴 시간 무대에서 혼자 수백 명의 관객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체력의 한계를 알고 에너지를 분배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소리꾼을 비롯해 판소리를 만드는 작창가, 밴드 보컬, 작가까지 도전한 그는 이제 판소리를 하는 소시민을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단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무엇으로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클라이맥스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장면은 있어요. 공연을 마친 소리꾼이 분장실로 돌아와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바나나를 입에 문 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게 영화의 끝이었으면 좋겠어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이자람#소리앓이#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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