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선포하고 국가서 제사까지… 정조의 ‘독감 대유행’ 신속 대처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3일 03시 00분


조선시대 ‘전염병 대응방식’ 연구
한양서만 두달간 6만여명 사망
괴소문 퍼지자 민심 수습 역점

조선시대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한 굿을 그린 ‘무녀내력’(위 사진). 당시 백성들은 제사를 받지 못하고 떠도는 귀신이 역병을 퍼뜨린다고 믿었다. 한양도성 북쪽 북한산에는 역병 귀신의 넋을 달래기 위해 국가가 지은 제단인 ‘여단(厲壇)’(원 안)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한 굿을 그린 ‘무녀내력’(위 사진). 당시 백성들은 제사를 받지 못하고 떠도는 귀신이 역병을 퍼뜨린다고 믿었다. 한양도성 북쪽 북한산에는 역병 귀신의 넋을 달래기 위해 국가가 지은 제단인 ‘여단(厲壇)’(원 안)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마을에 또 괴이한 병이 생겼다. 이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사람이 죽는다. 한양 사람들이 상주 없는 시신을 실어 날라 짚으로 덮어 쌓아둔 게 산과 같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류의목(1785∼1833)이 1796∼1802년에 쓴 일기 ‘하와일록(河窩日錄)’의 1799년 독감 관련 기록이다. 김정운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최근 전국역사학대회에 발표한 논문 ‘1799년 독감과 국가의 대응 방식’에서 조선 사회의 전염병 대응방식을 다뤘다. 하와일록에 따르면 독감 창궐 두 달여 만에 하회마을에서만 약 400명이 사망했고 한양에서는 6만3000여 명이 숨졌다. 당시 홍문관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종수(1728∼1799),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1720∼1799)을 비롯해 전국 8도 관찰사 8명 중 7명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괴소문이 퍼졌다. ‘호인(胡人·청나라 사람)이 단지 2개를 조선에 가져왔는데 하나는 창질(瘡疾·피부병) 단지이고, 하나는 감기 단지다. 지금 이 병은 감기 단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루머였다.

지금이야 독감이 중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류의목은 일기에 ‘소고기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되기에 요즘 시골 거리에서 소를 많이 잡는다’고 썼다. 잘 먹고 쉬는 것 외에 뾰족한 대응법이 없던 서민들이 평소 먹기 힘든 소고기로 효험을 기대한 것이다. 농사에 필수인 소를 도축해야 할 정도로 당시 독감 피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은 국가적 재난상황에 바싹 긴장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국가 재난상황을 선포하고 약 20일 만에 대책을 마련한 후 매일 이행사항을 보고받았다. 진휼청(賑恤廳)에 빈민들을 모아 치료하고, 각 지방에도 임시 치료시설을 만들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조세를 줄이고 감염 방지를 위해 군역도 일시 중단했다. 무엇보다 민심 수습에 역점을 뒀다. 여귀(厲鬼·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가 병을 일으켰다고 믿는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신 매장을 위한 별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당시는 3년상이 관례였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은 철저히 격리해야 했다. 땅이 부족해 시신 매장에 어려움을 겪자 국가가 나선 것. 하와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임금이 시신 묻을 곳이 없는 가련한 백성들을 위해 슬퍼했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정조는 전염병 사태 속에서도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재난에 신속하게 대응했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전염병 대응방식#독감#정조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