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건륭제, 천주교 서양 선교사에 관대… 조선 포교에도 영향”

이기욱 기자 입력 2021-08-16 03:00수정 2021-08-1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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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와 천주교’ 저자 이준갑 교수
천문-역법에 뛰어났던 선교사들 측근으로 두고 신앙생활 허용
종교 탄압 속 中포교에 ‘숨통’
이승훈, 한국인 처음 세례 받아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는 “종교도 결국 세상 속에 있다. 종교의 논리로만 종교를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종교의 세속적인 성격에 집중해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준갑 교수 제공
순조실록에 따르면 1802년 조선 형조판서 조윤대(1748∼1813)는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청나라의 서양 선교사에게서 천주교를 들여왔다며 이들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는 글을 당시 황제 가경제(1760∼1820)에게 올린다. 가경제는 “서양인들은 선교를 행한 일이 없다. 조선의 무뢰한들이 몰래 다른 곳에서 교리를 들여와 전파하다가 발각돼 이런 말을 날조하려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며 조선이나 천주교 단속을 확실히 하라고 답한다.

조선은 신부가 들어오기 전부터 천주교 신앙이 나타났지만 신부 없이 미사를 드릴 수 없어 최초의 미사는 1795년 중국 베이징 교구의 주문모 신부가 파견돼 거행됐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도 천주교가 탄압을 받았다. 그 와중에 서양 선교사들은 어떻게 중국에 머물며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지난달 30일 출간된 신간 ‘건륭제와 천주교’(혜안)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60)는 가경제의 아버지 건륭제(1711∼1799) 때 서양 선교사들의 숨통이 트였다고 서술한다. 중국인 천주교 신자는 탄압하면서 서양 선교사에게는 관대했던 건륭제의 이중적 태도를 연구한 그를 13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 교수는 “건륭제는 선교를 금지하면서 자기 측근의 선교사는 보호했다”고 말한다. 통치에 필수적인 천문과 역법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이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건륭제는 이들을 심복으로 두고 신뢰했다. 왕의 신뢰는 탄압 속에서도 포교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건륭제는 선교사들이 베이징 천주교당 내에서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허락했고, 중국인이나 타국 사신이 이곳에 드나드는 것을 묵인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1756∼1801)도 1784년(건륭 49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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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가 보인 이중성의 원인에는 중국인이 우월하다는 화이론(華夷論)도 있다. 중국인 천주교 신자 400여 명과 선교사 18명이 탄압당한 ‘건륭대교안’(1784∼1786)에서 건륭제는 옥중 사망한 6명을 제외한 선교사들을 모두 사면한다. 이 교수는 “건륭제는 유교를 따르지 않는 서양인에게 유교국가의 법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중국인 차별이 아니라 유교를 따르는 중국인만 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 교수의 연구는 당시의 기축통화 ‘백은(白銀)’이 중국 곳곳으로 유통된 경로를 추적하면서 시작됐다. 무역 자료를 통해 17, 18세기 세계에서 생산된 백은 12만 t 중 절반이 중국으로 유입됐다는 것만 알 수 있었던 그는 천주교 탄압 기록을 분석했다.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통해 선교 자금으로 백은을 들여왔기 때문. 이를 통해 백은이 광저우부터 쑤저우까지 유통됐음을 확인했다.

“종교를 돈이라는 세속적인 측면으로 다뤄 신부님들이 안 좋아하실 수도 있죠(웃음). 하지만 앞으로 기존과 다른 접근이 연구에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이준갑 교수#건륭제와 천주교#천주교 조선 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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