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펴낸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러시아서 항일의병 조직에 앞장… 안중근 의사 하얼빈 거사도 도와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아 국내외 최재형 선생 연구 더 필요”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은퇴한 80대 기업가 4명이 2011년 장학회를 세운 것이 최재형기념사업회의 시작이었다. 이제 국가에서도 최재형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노비의 아들, 페치카(난로를 뜻하는 러시아어),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1900년대 초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60∼1920)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최재형은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 가난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했다. 러시아어를 배워 임대업과 건축자재 납품 등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러일전쟁 이후 전 재산을 쏟아부어 연해주에서 항일 의병 조직에 가담했다. 따뜻한 성품으로 이 지역 한인들에게 ‘최 페치카’라 불린 그가 일본군의 총탄에 순국한 지 올해 100주기가 됐다.
26일 서울 용산구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만난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63)은 “최재형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업적에 비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인물”이라며 “노비 출신인 데다 옛 소련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선생의 후손이 조상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며 억압받고 살아온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역사소설 작가이기도 한 문 이사장은 최근 최재형의 일대기를 다룬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을 펴냈다.
최재형은 1908년 당시 1만3000루블을 군자금으로 쾌척해 항일의병조직인 동의회(同義會) 조직에 크게 기여했다. 동의회에서는 안중근 이위종 이범윤 등도 활동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했고, 거사에 사용한 권총도 최재형이 제공했다. 최재형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영난으로 발행이 중단된 한국국민회의 기관지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사들여 일제를 비판했다.
1920년 4월 최재형이 연해주 의병조직을 습격한 일제의 총탄에 작고한 뒤 그의 자손들은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문 이사장은 “아들과 사위는 총살되거나 수감됐고 부인과 딸도 강제 이주돼 중앙아시아에 뿔뿔이 흩어졌다”며 “옛 소련의 고려인 탄압으로 모두 과거를 숨기고 살다 손자 최발렌틴 씨는 1991년 옛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공적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고 했다. 올 2월 83세로 별세한 최발렌틴 씨는 생전 병원비가 없어 국내에서 모금을 해 돕기도 했다.
최재형은 1962년,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문 이사장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문창범 선생(1870∼1934)이 더 높은 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공로 인정에 균형이 필요하다”며 “국내외에서 최재형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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