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3·1운동 재판 보도로 제국의 눈 찔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진상 은폐하려는 일제에 맞서
판결문 전재와 공판記 형식으로 검열 피해가며 고문실상 등 폭로

1920년 4월 7일 동아일보 기사 ‘47인 예심결정서(2)’(왼쪽 사진)와 8월 22일 기사 연통제 사건 공판기. 판결문과 법정의 대화를 전하는 형식으로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조선의 독립 주장과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동아일보DB
1920년 4월 7일 동아일보 기사 ‘47인 예심결정서(2)’(왼쪽 사진)와 8월 22일 기사 연통제 사건 공판기. 판결문과 법정의 대화를 전하는 형식으로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조선의 독립 주장과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동아일보DB
“최남선은…조선의 독립은 시대의 대세에 순응하고 인류 공동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으로 하물(何物)이라도 저지 억제키 불능함으로 차 목적을 성(成)키 무의(無疑)함으로 조선 민족은 정당히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의 의사를 발표하고….”

동아일보 1920년 4월 8일자에 실린 기사 ‘47인 예심결정서’다. 기미독립선언서의 문장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제는 검열을 통해 3·1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6∼18일 8회에 걸쳐 민족대표 ‘47인 예심결정서’를 연재하는 등 판결문 전재와 공판기의 형식을 빌려 3·1운동의 주체와 경과에 대한 진상을 알렸다.

한기형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는 최근 발간한 저서 ‘식민지 문역(文域)’의 ‘3·1운동과 법정서사―조선인 신문의 반검열 기획에 대하여’ 편에서 일제의 검열에 저항한 동아일보의 노력을 조명했다. 한 교수는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교묘히 제국 일본의 권력을 부정한 전복적 법정 서사”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판결문은 3·1운동에 대한 제국 일본의 단죄를 기록한 자료로 식민권력의 언어였기에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는 그 약점을 파고들었다”면서 “동아일보의 보도는 제국의 눈을 찌르려는 반(反)식민 정치 전략이자 피(被)검열 주체의 적극적인 반(反)검열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강우규는…얼굴에는 여전히 붉으려한 화기를 가득히 띠었으며 위엄 있는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서서히 들어오더니….”

이 같은 전략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기도한 강우규 의사의 공판기(1920년 4월 15일∼5월 28일 5회 연재)에도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공판기를 통해 강 의사를 구속한 식민지 실정법의 문제점을 폭로했다.

동아일보의 대한청년외교단·대한애국부인단 공판 방청 속기록 보도(1920년 4월 24일∼6월 11일 6회 연재)는 식민지 민간신문 공판기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한 교수는 평가했다. 이 공판기는 이들 단체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전말을 드러내고, 검사 논고의 비합리성과 피고가 겪은 고문 등을 폭로했다.

또 임시정부와 비밀연락을 하던 조직인 연통제 사건의 공판기(1920년 8월 22∼31일 7회 연재)는 표제문 15개 가운데 검사 발언은 단 한 개뿐이고, 나머지를 “조선은 곧 조선인의 조선이니 조선인이 통치함이 당연할 일” 같은 피고들의 주장으로 채웠다. 한 교수는 “당대 법정서사의 극점을 보여준다”며 “조선 지배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신문 지면에 담아 동아일보가 과연 식민지의 매체인가를 의심하게 할 만큼 파격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3·1운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