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석의 시간여행]탈(脫)조선과 탈북 행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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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러 원산항에 모여든 장면(매일신보 1926년 11월 21일자).
일제강점기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러 원산항에 모여든 장면(매일신보 1926년 11월 21일자).
“요즘 압록강 두만강에서 국경을 넘어가는 사태는 해괴하고 놀라운 점이 더러 있소.”

지금 평양에 거주하는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말이 아니다. 옛날 서울에 거주했던 조선의 국왕 고종의 육성이다. 잇따르는 탈조선 행렬에 관한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달하는 자리에서 꺼낸 서두다. 때는 1869년, 집권 7년 차를 맞은 17세의 고종이 막후 권력자인 아버지 대원군의 섭정하에 국왕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였다. 김일성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김정은의 고조부가 두 돌을 막 넘긴 시절의 일이다. 지금의 탈북자 문제에 관해 김정은이 어떤 교시를 어떠한 어법으로 하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147년 전 조선왕조가 당면한 탈조선 사태를 고종이 어떠한 각도로 접근했는지는 실록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다.

‘자기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몰래 낯선 고장으로 달아나는 것이 어찌 보통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부림과 거둬들임이 무겁고 가혹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어 그런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고종실록·1869년 11월 23일자)

강제노역과 납세의 부담을 견딜 수 없는 지경이어서 조선을 떠나는 유민(流民)이 속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전국은 근래 보기 드문 자연재해와 흉년 및 대규모 기근 속에 수년째 허덕이고 있었고 그 참상은 북부에서 극심했다. 여기에 지방관리들의 탐욕과 학정, 즉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백성의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 대중이 택하는 것은 집단 봉기이거나 개별 탈출인데, 이 시기의 조선은 후자였다. 그것이 북부 조선의 접경지대에서 빈번한 월경(越境), 즉 탈(脫)조선 사태로 나타났다.

필사의 탈출 행렬은 국경 통제에도 불구하고 이어졌다. 국경을 벗어남은 반역을 도모하는 것 못지않은 대역죄였다. 당국은 한편으로 단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심을 달래는 강온 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중국의 협조를 받아 체포하여 송환받았다. 중국에 외교공문을 보내 강제 송환 조치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고종은 위의 교시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당국은 탈출자들이 자진해서 돌아오면 처벌하지 않고 식량과 토지를 지급한다는 약속도 병행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지방관리의 착취를 엄금한다는 탈출 예방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떠난 자들은 제 발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의 옌볜과 지린 성을 포함한 동북3성 지역으로의 탈출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 이주민이 객지에 정착하고 대를 잇는 동안 조선의 왕조는 멸망했다. 조선의 지도부가 그토록 탈출을 막으려 애를 쓴 것은 무엇보다 왕조 국가였기 때문이다. 왕정에서 백성은 극단적으로 말해 왕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다. 국가의 자원이자 국왕의 재산이 국외로 반출되는 것은 왕정에서 엄금하는 불법이며 엄벌의 대상이다. 그것은 국기(國基)를 문란케 하는, 다시 말해 국왕의 권력을 뒤흔드는 사변이다. 현대의 공화국에서 교도소나 군대를 무단이탈하는 행위 이상의 죄목이다.

그렇게 명줄을 재촉한 조선은 일제의 통치 시기에도 국경을 넘어가는 전국적인 유민들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강력하게 단속되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왕조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광복을 맞고 북조선 지역에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다시 탈북 러시가 재연되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공화국이 아니라 왕정으로 회귀하는 듯한 본색이 드러나면서 촉발된 엑소더스일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
#북한#국경#탈북#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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