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에서도 점차 음식과 관련된 축제가 늘고 있다. 음식 축제라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풍요로운 수확을 기념하는 ‘잔치’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만 지금의 음식 축제는 농경시대의 그것과는 달라서 농작물보다는 ‘지역의 미식문화’, 생산자보다는 ‘요리사’로 패러다임의 중심이 확대되거나 전환됐다.
그럼에도 그 지역의 자연이 빚어낸 맛을 즐기고 나눈다는 점에서 잔치라는 근본적인 개념은 다르지 않다. 지역 농산물에 근거한 유럽의 크고 작은 전통 축제가 그러한 것은 물론이고, 비교적 음식 역사가 짧은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자신들만의 음식 축제, 즉 잔치를 도모함으로써 미식 문화의 활성화와 관광사업 증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공략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개최된 음식 축제들이 하나같이 해외에서 초대해온 스타 셰프를 무슨 간판급 스타처럼 내세우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요리와 강연을 맛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기회이지만, 잔칫상에 우리네 요리와 맛보다 이방인의 비중이 크다면 이를 우리네 잔치라고 할 수 있을까? 》
워싱턴 주를 맛보는 잔치, 테이스트 워싱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신상 와인을 즐기는테이스트 워싱턴의 뉴 빈티지 파티. 바앤다이닝 제공
‘맛’에 겸손해지려면 유럽을 가봐야 하지만 ‘맛’을 찾으려면 미국을 가야 할 만큼 미국발 외식 트렌드는 빠르고 다양하다. 대부분 동쪽으로는 뉴욕, 남서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로스앤젤레스 정도가 그 진원지인데 혜성처럼 등장한 포틀랜드 덕분에 미국 북서부 지역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를 대표하는 도시다. 미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 2위로 선정된 그곳에서 매년 3월이면 워싱턴 와이너리들과 레스토랑들이 대거 참여하는 음식 축제 ‘테이스트 워싱턴(TASTE WASHINGTON)’이 열린다.
올해 19회째를 맞이한 테이스트 워싱턴은 지역 와인과 음식을 즐기는 잔치로 미국 내 단일 주에서 벌이는 미식 행사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워싱턴와인협회가 지역 와인의 활성화를 위해 1998년도에 처음 시작했다. 지금은 지역 레스토랑과 농장 등이 협력하는 잔치로 확대됐고 시애틀 관광청이 와인협회와 협력하여 주최하고 있다.
멜버른 푸드앤드와인 페스티벌의 푸드 트럭.바앤다이닝 제공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개최된 올해 축제에는 워싱턴 주 내 약 237개 와이너리가 참가해 5500여 개의 와인이 등장했다. 축제는 크게 3개의 주요 행사로 구성됐다. 레드 또는 화이트 컬러로 드레스코드를 지정한 ‘레드&화이트 파티’에서 출발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신상 와인을 즐기는 ‘뉴 빈티지 파티’를 거쳐, 한자리에서 워싱턴 주 와인과 지역 레스토랑들의 요리를 원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랜드 테이스팅’으로 이어지며 축제의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프로축구와 미식축구 경기로 활기찬 센트리링크 필드의 이벤트 센터에서 열린 그랜드 테이스팅이 인상적이다. “워싱턴 와인에 한번 푹 빠져봐”라고 말하듯 237개의 와이너리가 일제히 코르크를 땄다. 시애틀 레스토랑 66곳의 음식을 한자리에서 여행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란! 마치 수백 개의 지역 와인에 둘러싸여 ‘내 맘대로 페어링(짝짓기)’을 즐기는 게임장에 온 듯하다. 이쯤 되면 적어도 이방인 한 명에게는 잔치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테이스트 워싱턴’은 시애틀에서 벌어지는 미식 축제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워싱턴 주를 맛보는 잔치였다. 멜버니언들의 먹고 마시는 법, 멜버른 푸드&와인 페스티벌
멜버른 푸드앤드와인 페스티벌 푸드트럭 앞의 연인. 바앤다이닝 제공 3월 4일부터 13일까지 호주 멜버른은 레스토랑부터 광장, 강변 등 어디를 가든 골목마다 먹고 마실 것으로 가득했다. 올해로 24회를 맞은 ‘멜버른 푸드&와인 페스티벌’은 1993년 12개 이벤트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250개가 넘는 프로그램을 갖춘 세계 미식 축제다. 올해의 테마는 ‘장소의 감각(Sense of Place)’. 장소가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는 의미인 만큼 축제는 멜버른의 골목, 와이너리, 해변, 공원 등에서 다양하게 펼쳐졌다.
테이스트 워싱턴의 레드&화이트 파티. 바앤다이닝 제공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세계에서 가장 긴 점심(The World’s Longest Lunch)’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호주 빅토리아 주의 화창한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앨버트 파크에 차려졌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테이블에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3코스의 점심이 일제히 차려지는 프로그램으로 축제의 상징처럼 여겨질 만큼 인기가 높다. 올해는 1616명이 참가해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와인과 함께 느긋하게 즐겼는데, 이탈리아계의 호주인으로 멜버른에서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가이 그로시 셰프가 요리를 맡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은 멜버른 시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퀸스클리프 항구, 벨라라인 포도원, 데일스퍼드 호수 등 멜버른 근교 24곳에서도 같은 날 동시에 진행될 만큼 지역 내에서도 호응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긴 점심을 즐기고 있는 호주 멜버른의 관광객들. 바앤다이닝 제공 또한 빅토리아 주에 있는 110개 와이너리의 와인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시티 셀러’를 비롯해 야외에서 음식 영화를 상영하는 ‘푸디 필름스’, 치즈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등 우유를 이용해 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직접 그 맛을 선보이는 ‘어번 데어리(Urban Dairy)’, 그리고 멜버른의 힙스터들이 모여드는 옥상에서 벌어지는 ‘루프톱 가든 바’(최근 멜버른에는 루프톱 바의 개업 소식이 끊이질 않을 만큼 인기다), ‘비어 허브’, ‘리버사이드 팝업 시푸드 페스티벌’ 등 와인, 맥주, 요리, 문화, 트렌드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을 듯 빼곡한 일정들에 도시 곳곳이 떠들썩했다. 정체성 정립이 필요한 국내 음식 축제
테이스트 워싱턴의 뉴 빈티지 파티. 바앤다이닝 제공 자신들만의 오롯한 미식 역사가 짧다거나 다양한 미식 콘텐츠가 부족한 국가나 도시의 경우 관광 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내노라하는 해외 셰프를 모셔와 세계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싱가포르의 ‘세계미식가대회(World Gourmet Summit)’나 아부다비의 ‘고메 아부다비’가 대표적이다.
멜버른 페스티벌의 비빔밥 푸드트럭. 바앤다이닝 제공하지만 발효와 나물 문화를 비롯해 한 끼에도 몇 가지 반찬을 올리는 반상 문화에 둘러싸인 한국에서도 해외 셰프부터 내세우는 잔치를 벌여야 할까. 최근에 열린 서울푸드페스티벌이 그렇다. 국내 유력 미디어와 행사조직위원회가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잠수교까지 막으며 축제를 벌였지만 ‘서울을 맛보는 잔치’가 아니라 해외 스타 셰프들이 대거 초대된 잔치로 변질되었다. 제주에서 열린 푸드앤와인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경쟁하듯 해외 셰프를 불러오고 그들의 기술력이 협업된 잔치임을 강조했다. 왜 잔치의 중심에 제주의 자연이 허락한 ‘맛’과 지역의 커뮤니티가 있지 않은가. 제주 맛집 50곳이 참여하는 고메 위크가 열리기는 했지만 초대 셰프에 초점을 맞춘 부대 행사들을 내세우느라 제주 맛집의 존재는 홈페이지에만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것이 분명히 있어야 스타 손님을 초대해도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다. 주변의 미식 선진국처럼 세련된 미식 문화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급히 외세의 명성을 빌려와 봐야 그 즐거움이, 그 효과가 얼마나 가겠는가.
빨간색이나 흰색으로 드레스코드를 지정한 레드&화이트 파티. 바앤다이닝 제공 외국의 유명인으로 치장하기보다는 현재 보유한 것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지역의 농산물과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서 ‘잔치’라는 의미를 제대로 느꼈다면 그 축제는 성공이 아닐는지. 테이스트 워싱턴과 멜버른 푸드앤드와인 페스티벌이 내게는 그랬다. 평소에 즐기지 않던 화려한 경험을 차리는 어색함도, 외부의 스타 손님을 모셔와 요란하게 화장시키는 공허함도 없었다. 지역 내의 요리사, 주류 생산자, 도시 농부, 외식 기획자, 여행 기획자가 한데 어우러져 자신들의 잔치를 벌였다. 우리는 언제쯤 팝콘처럼 튀겨져 나온 축제가 아니라, 작은 규모라도 지역사회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고 교류하며 자발적으로 성장의 밑거름을 이루는 생태계가 담긴 잔치를 시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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