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모조모 뜯어보다 보면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 동아일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남아공 작가 켄트리지展 2016년 3월 27일까지

윌리엄 켄트리지가 지난해 중국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3채널 영상작품 ‘양판희를 위한 메모’.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중에 상연된 공산당 선전 연극 ‘양판희’를 뼈대 삼아 프랑스 파리 코뮌 때 신문 등의 자료를 끌어들여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이상과 실패를 고찰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윌리엄 켄트리지가 지난해 중국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3채널 영상작품 ‘양판희를 위한 메모’.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중에 상연된 공산당 선전 연극 ‘양판희’를 뼈대 삼아 프랑스 파리 코뮌 때 신문 등의 자료를 끌어들여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이상과 실패를 고찰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연말은 미술관도 대목이다. 지난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국현) 총 관람객 수는 45만9646명으로 지난해 총 관람객(235만6821명)의 20%였다. 2016년 3월 27일까지 서울관에서 여는 윌리엄 켄트리지 개인전 ‘주변적 고찰’은 피한(避寒) 관람객에게 추천할 만한 알짜 메뉴다. 60세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켄트리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영상, 목탄 드로잉, 판화, 설치작품 108점을 선보이는 전시.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유념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찾아가야 한다는 거다. 》

일요일 오후 폐장 안내방송이 나오자 한 관람객이 “어, 벌써 이렇게 됐나. 다른 덴 가보지도 못했는데”라고 한탄했다. 요모조모 뜯어보다 하염없이 주저앉도록 붙드는 작품이 그득하다. 소나무가루 섞은 시멘트보드를 콘크리트 벽체처럼 세워 나눈 구획마다 영상 서너 개가 묶여 차례로 돌아간다. 인형극 프레임에 기계장치와 영상을 조합한 설치작품 ‘블랙박스’(2005년)의 구동 시간만 35분이다.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에서 20세기 초 독일군이 저지른 토착민 대학살 이야기다.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금세 폐장시간에 쫓긴다.

다른 하나는 놓친 부분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며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몇몇 틈새에 뜻밖의 전시공간이 숨어 있다. 제2전시실 안쪽 ‘시간의 거부’(2012년) 방을 지나쳤다면 다시 관람하길 권한다. 벽을 빙 두른 30분 길이의 5채널 영상, 메가폰 머리를 단 로봇을 연상시키는 사운드장치, 기묘한 생김의 ‘숨쉬는 기계’로 구성된 영역이다. 무대 한복판에 올라 작품 일부로 스며드는 경험을 ‘편안하게’ 해볼 수 있다. 작가는 대학에서 정치학, 미술, 연극을 전공하고 한때 TV시리즈 예술감독으로 일했다.

동선(動線) 배려가 부족한 건 아니다. 켄트리지는 지난주 열린 관람객 대상 강연에서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바깥세상을 스튜디오에 끌어들여 해체하고 재배열해 확장시킨다. 그 과정은 인간의 삶을 닮았다. 스튜디오는 사람의 뇌처럼 다양한 외연(外緣)을 재구성해 출력하는 공간이다. 조금은 거칠고,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상태가 자연스럽다. 예술과 삶의 ‘흥미로운 난센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의 운명을 인간이 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공간설치작품 ‘시간의 거부’(2012년). 미술관 속에 마련된 하나의 별세계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간의 운명을 인간이 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공간설치작품 ‘시간의 거부’(2012년). 미술관 속에 마련된 하나의 별세계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비롯해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약육강식을 직시한 비판의식이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하지만 주절주절 나열한 직설은 없다. 이미지, 음향, 기계장치, 텍스트, 퍼포먼스를 베테랑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자유자재로 유희하듯 조합해 허영 없는 상징의 행렬을 구성했다. 도구를 활용하는 재미와 주제의 무게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도 매몰됨이 없다. ‘왜 이 도구를, 기술을, 재료를 사용했는지’ 의구심이 남지 않는다. 치밀한 디테일을 만끽하며 한 겹 너머 저편을 건너다보게 만들 뿐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국립현대미술관#남아공#켄트리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