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산파 가우처 목사 열정-헌신 되새길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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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25주년 중앙감리교회 정의선 목사

정의선 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가 존 가우처 목사의 흉상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가우처 목사는 여성과 흑인 등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위한 교육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정의선 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가 존 가우처 목사의 흉상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가우처 목사는 여성과 흑인 등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위한 교육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행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에는 뜻밖에 한국 개신교사의 한 페이지가 숨겨져 있다.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로 불리며 최근 창립 125주년을 맞은 중앙감리교회다. 옛 예배당은 사라지고, 교회는 현재 신축 빌딩 내의 일부 공간만 사용하고 있어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21일 찾은 이 교회에는 배재학당을 세운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와 존 가우처 목사(1845∼1922)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정동제일교회에 이어 1890년 이 교회를 세웠다. 그래서 감리교단 내에서 두 교회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 교회로 여겨지고 있다. 가우처 목사는 아펜젤러에 비해 낯설지만 미국 북감리교단의 대표적 지도자로 조선 선교와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인물이다.

“1883년 민영익 등 11명으로 구성된 조선의 외교사절단인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도중 가우처 목사를 만난다. 민영익은 조선에서의 교육과 의료, 선교 사업을 요청했고, 가우처 목사는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이후 감리교단 극동 지역 책임자인 로버트 매클레이가 고종을 만나 선교를 허락받고, 이후 아펜젤러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한다.”(정의선 담임목사·69)

가우처 목사는 실제 조선에서의 선교와 교육 사업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 부인이 재력가였던 그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감리교단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중앙감리교회가 예배당을 개축할 때 가우처기념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당시 세워진 붉은색 교회 건물은 1983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매각됐고, 지금은 철거된 상태다.

2006년 제2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 목사는 “당시 어려운 교회 재정과 발전 방향 등 여러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래도 이전과는 별도로 그 공간을 유지하고 보존했어야 하는데…”라며 짙은 아쉬움을 표시했다.

중앙감리교회는 11일 창립기념일을 맞아 가우처 목사의 흉상 제막식과 ‘한국 선교의 개척자-가우처, 매클레이, 아펜젤러’ 출간 기념회를 개최했다. 개별 교회사를 써봐야 담임목사의 공적 자랑이 되기 쉬워 교회와 직간접으로 인연이 있는 선교사들을 조명한 책을 출간했다는 설명이다.

현재 교회 한편에 있는 가우처 목사 흉상에는 사연이 있다. 19대 방훈 담임목사의 아들인 방은호 장로가 옛 예배당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다 미국에서 제작해 기증한 것이다. 특히 가우처 목사가 활동한 미국 볼티모어 러블리 레인 교회에서 전달식을 가진 뒤 한국에서 다시 행사를 가져 그 의미를 더했다.

정 목사는 “가우처 흉상은 잊혀지고 있는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가우처 목사의 삶은 분열이 아닌 연합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배려를 상징한다”고 했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인근 우정국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출석하던 교회도 지금의 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승동교회다. 그는 “돌고 돌아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며 웃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가우처#정의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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