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금고안에 넣어라” 해외 저작권자의 기상천외 요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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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동시출간 화제의 번역서들 ‘철통 보안의 세계’

《 “출판사에 금고를 설치해 보관하십시오.” 지난달 도서출판 ‘열린책들’ 편집자들은 깜짝 놀랐다. 대작으로 통하는 ‘이 책’의 국내 판권을 따낸 기쁨도 잠시. 이후 제시된 영국 출판사의 계약조건과 보안(保安) 조건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는 생전 처음 받아봐서…. 그래도 하반기 출판시장에 활력소가 될 책이라 조건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하퍼 리 55년만의 신작 내달 14일 출간

베일에 싸인 책은 미국 소설가 하퍼 리(89·사진)의 신작 소설이다. 하퍼 리는 1960년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발표해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이후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해왔다. 그런 그녀의 두 번째 소설 ‘가서 파수꾼을 세워라(Go Set a Watchman·이하 파수꾼)’가 55년 만인 다음 달 14일 전 세계에서 동시 출간되면서 세계인의 관심이 뜨거워진 상태다. 아마존닷컴에서는 100만 부가량의 예약판매가 이뤄졌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올 초부터 ‘파수꾼’ 판권 경쟁이 펼쳐졌고 지난달 2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열린책들’에 낙찰됐다. 선인세는 3억 원 내외로 알려졌다.

이 책의 보안 조건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 계약이 성사되자 ‘파수꾼’ 저작권을 가진 영국 하퍼콜린스 출판사 관계자가 직접 방한했다. 그의 손에는 하드커버로 된 ‘파수꾼’ 영어 원고가 들려 있었다. “외서(外書) 출판 계약 시 대부분 해외 출판사는 e메일에 원고파일을 첨부해 보내요, 담당자가 직접 원고를 들고 온 것은 처음이죠.” 열린책들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퍼콜린스 측은 “금고를 설치해 원고를 보관하면서 번역 작업을 진행하라” “열람은 보안각서를 쓴 사람으로 한정하라”는 조건도 달았다. 열린책들은 사내 금고에 원고를 넣은 후 번역자를 사무실로 불러 번역작업을 해야 했다. 실제로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의 일곱 살 주인공이 어른이 된 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간다는 설정 외에는 모든 내용이 극비에 부쳐진 상태다. 중국은 원고 유출 가능성이 높다고 봐서 저작권자가 동시 출판국가 목록에서 제외시켰다는 후문이다.

○ 쪽대본, 해킹 방지… 도서 보안도 가지각색

전 세계 동시 발간 화제작들은 까다로운 계약조건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자서전 ‘힘든 선택들’(김영사)은 속칭 ‘페이크(fake) 원고’가 사용됐다. 저작권자인 미국 사이먼앤드슈스터 출판사는 김영사에 원고를 주면서 “완전본이 아니다. 계속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수차례 달라진 내용이 담긴 원고가 전달돼 김영사 측은 번역본을 계속 수정해야 했다. 원고 역시 저작권자가 지정한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매번 다른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내려받을 수 있었다.

2011년 10월 전 세계에 동시 출간된 ‘스티브 잡스 자서전’은 조각난 원고, 즉 ‘쪽대본’ 형식으로 국내 출판사(민음사)에 전달됐다. “내용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쪽대본 원고를 모아 번역해 국내판을 완성했다.

지난해 5월 출간된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의 계약조건은 ‘무(無)인터넷 구역’이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도청·감청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다룬 이 책에 추가 폭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낸 모던타임스 박수민 대표는 “번역 중인 워드파일은 휴대용저장장치(USB)에 보관하고 인터넷 연결이 끊어진 PC에서 작업했다”며 “미국 정보기관에서 이 책 내용을 해킹하는 것까지 우려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의 2013년 작 ‘인페르노’는 ‘감금’까지 활용한 예다. 당시 11개국 번역가들이 이탈리아 밀라노 내 지하벙커에 모여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휴대전화가 압수됐고 노트북, 종이의 벙커 반출이 금지됐다. 번역자가 매일 번역한 원고를 제출해야 호텔로 퇴근할 수 있었고 외출할 때는 보안요원 감시까지 받아야 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철통 보안의 세계#하퍼 리#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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