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작가 조평휘 씨의 ‘대둔산’(160×455cm). 구름은 살아 움직이고 산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붓질이 역동적 구도와 어우러진 대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장엄하고 우렁차다. 수묵으로 완성한 가로 4m가 넘는 대작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과 굽이굽이 휘어진 골짜기를 보듬고 있다.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답답한 가슴이 확 뚫린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구름과 산―조평휘’전은 자연이 품은 치유의 힘을 예술로 승화한 전시다. 운산(雲山)이란 자신의 호처럼 구름과 산을 즐겨 그린 한국화가 조평휘 씨(83)의 60년을 되짚는 회고전이다. 거대한 화폭을 가득 채운 북한산 대둔산 백두산 같은 전국의 산이 공간감과 운동감을 과시하며 드넓은 전시장을 제압한다. 손오공이 올라탄 듯 구름은 빠르게 흐르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은 판타지 영화 배경처럼 신비롭게 다가온다. 중앙 무대를 기웃거리지 않고 대전에서 묵묵히 작가의 길을 개척한 원로화가의 폭발적인 운필을 재발견할 기회다. 7월 6일까지. 2000원. 02-2188-6248
미국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 씨의 3D애니메이션 ‘디아스포라’. 씨앗과 꽃잎이 흩어졌다 다시 다발을 이루는 과정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여준다. 리안갤러리 제공운산이 전통 매체인 수묵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되살렸다면 미국의 영상미디어작가 제니퍼 스타인캠프 씨(56)는 첨단 기술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그는 꽃잎과 나비가 흩날렸다 다시 모이는 3D 애니메이션을 선보였다. 6월 21일까지. 02-730-2243
자연을 소재로 위로와 치유를 선사하는 두 전시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예술적 영매로 손색이 없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권한다.
○ 독자적 산수방식 파노라마 체험
지역 화단에서 활동한 운산은 대중은 물론 미술계에도 잊혀진 이름이었다. 침체된 한국화. 그중에도 더 위축된 산수 장르의 작업을 해온 것도 한몫을 했다. 이번 회고전은 모든 장애를 넘어 독자적 산수 양식을 구축한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작가는 황해도 연안 태생으로 서울대 미대 중등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에서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에게 동양화를 배웠다. 1950∼60년대 추상을 실험하고, 1970∼80년대 산수화로 회귀한 것은 남과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변화가 본격화됐다. 그는 은은히 번지는 선염 대신 짧은 터치를 겹겹이 쌓아올린 적묵법을 선택했다. 대담하고 역동적인 구도, 실경 사생을 기반으로 내면적 감성을 담은 표현주의적 붓질을 보태 현대 산수의 새 지평을 연 것이다.
60대에 완성한 운산 산수는 익숙하면서 낯설고, 사실적이면서 추상적이고, 섬세하면서 위풍당당하다. 수묵의 전통과 현대감각이 서로 공명한 덕이다. 미술시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작품의 규모에서도 자신만의 양식을 정립하겠다는 집념이 엿보인다. 왕신연 학예연구사는 “한국화의 침체를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신진작가들에게, 운산의 작품과 작가로서의 행보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합집산 세태 자연에 빗대
리안갤러리 지하 1층에 설치된 3D애니메이션 ‘디아스포라’는 꽃과 나뭇잎, 포자가 허공에서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20년간 디지털 미디어로 작업한 작가답게 자연현상과 움직임이 짜임새 있고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사회적 현상으로 이산을 빗댄 작업이지만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일화에서 영감을 얻은 ‘로니 레이건’은 전시장이 문을 닫은 뒤 오후 7시∼밤 12시에 외부에서 볼 수 있다. 눈이 나빴던 레이건은 어린 시절 안경을 처음 쓴 뒤 이 세상에 나비가 존재하고 나뭇가지에 잎이 달려 있다는 것에 경이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프로젝터를 통해 실내에서 건물 밖으로 내보내는 화사한 나비의 영상으로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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