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피플]윤태호 “이게 진짜 사는 건가, ‘미생’은 그런 사람들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31일 05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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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가 정사원이 못 된 이유는…
●조치훈 9단이 말한 '어차피 바둑, 그래도 바둑' 기억에 남아
●차기작은 신안 앞바다 보물선 도굴꾼 이야기

출처=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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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

바둑에서는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이라 한다. 두 집을 만들기 전은 모두 '미생(未生)' 즉,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다. 상대로부터 공격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돌인 사석(死石)과는 달리, 미생은 완생할 여지가 있는 돌이기도 하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未生)'은 자신의 바둑(삶)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우리시대 평범한 샐러리맨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를 시작해 지난 7월 19일 '시즌 1' 연재를 마쳤다.

'미생'은 10대 시절을 바둑 특기생으로 보냈지만, 끝내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고졸 학력 88만원 세대 장그래가 대기업 종합상사 원 인터내셔널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 계약직으로 채용돼 좋은 선배, 동기들의 도움으로 진정한 상사맨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만화이다.

어둡고 사회성 짙은 전작 '야후', '이끼'에 비하면, '미생'은 다소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 특유의 생생한 인물과 디테일한 상황 묘사를 탄탄한 에피소드에 녹여내 지루할 틈이 없다. 다음 누적 조회수는 6억 여건(30일 오전 기준), 매회 1000건 안팎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 대부분은 "만화가 아니라 인생의 교과서"라는 찬사다. 독자평점은 10점 만점에 9.8점이다.

문화평론가 허지웅 씨는 "'미생'은 지금 연재되는 웹툰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라고 극찬했다. 웹툰 '신과 함께'의 주호민 작가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만드신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태호 작가는 인기를 실감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평론가들이 너무 심하게 평을 한 것 같다"며 겸손하게 답했다. 후배들의 칭찬에 대해서는 "저 있는 데선 그런 칭찬 안 한다. 제가 볼 때 걔네가 더 신기하다"라며 웃었다.

출처=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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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의 인기 비결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타깃 독자인 직장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빅 이슈에 노출되는 분들이 아니죠. 샐러리맨으로 하던 업무 계속 하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재조명을 받는 일이 드문데, 이렇게 만화 소재가 되고,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 소중한 일이라고 자세하게 묘사되니까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든 게 아닌가 합니다."

2010년 7월 윤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이끼'(강우석 감독)가 개봉했을 당시 윤태호 작가는 기자에게 "차기작은 바둑의 세계에 직장생활을 접목한 샐러리맨 성공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형 '시마과장(샐러리맨 성공신화를 그린 일본 만화)'"이라고 했다. 기획단계만 해도 제목이 '고수'(가제)였다.

-제목이 '미생'이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바둑 고수가 직장인에게 '처세법'을 알려준다든가, '이렇게 해야 한다'며 훈계하는 이야기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고민 후 제가 좋아하는 '루저' 이야기로 돌아갔어요. '미생'이라는 제목은 '목숨은 부지하고 살고 있으나, 과연 이게 진짜 사는 것인가' 하는 현대인들의 의문을 은유한 것입니다. 이 돌이 버릴 돌인지 살려야 하는 돌인지, 사석인지 살려야 하는 돌인지…. 어쩔 수 없이 나답게 살지 못한 현실이랄까,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그렸다는 점에서 '미생'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자 댓글 중에는 "회사 생활 묘사가 너무 정확하고 세밀해서 놀랐다", "20년 직장 생활한 것 같다"라는 내용이 많습니다. 바둑 10급에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회사 규칙부터 차장, 부장 직급 순서까지 모르는 게 많아 공부를 했습니다. 상사맨, 광고맨 아는 직장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죠. 한 달에 한번 6시간 이상 씩 자유 토론을 했습니다. 또 댓글을 보면서 수정했죠. 또 제가 과대평가 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만 특별하게 취재한 듯 하지만 대부분 드라마, 만화 작가들은 이런 정도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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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은 조훈현 9단과 중국의 '기성(棋聖)' 녜웨이핑 9단이 1989년 9월 겨뤘던 제1회 응씨배 결승 5번기 제5국(최종국) 기보에서 출발한다. 조훈현 9단이 한국 바둑 역사상 최초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던 바로 그 대국이다. 착수(1회)에서 시작한 '미생'의 본편은 145수(146회)에서 끝난다. 회가 거듭될수록 장그래도 성장한다.

-바둑을 잘 몰라도 읽기에 무리가 없습니다.
"'미생' 자체는 제 눈높이에 맞춘 만화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바둑을 잘 알면 바둑에 있는 매력적인 수를 다 쓰고 싶어 많은 시험에 빠졌을 것 같습니다. 대입해서 해석하기 좋은 도구가 바둑이니까 댓글도 풍부해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회 빼고는 댓글을 다 읽었는데 풍부하게 이해받는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인턴 생활을 거쳐 2년 계약직 직원이 된 주인공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 되죠. 될 수가 없죠.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요. 장그래가 정사원이 된다고 해서 모든 계약직 사원이 위로받을 수 없어요. 오히려 그건 기만적이죠. 고졸에 별다른 스펙도 없는 사람이 그 팀에서 일을 몇 개 했다고 객관적인 회사 평가 지표에 따라 정사원이 되겠어요? 게다가 그가 속한 영업 3팀은 크게 눈에 안 띄는 일을 하는 틈새 부서입니다. 왜 장그래만 승진하고 성공해야 합니까. 그건 판타지입니다."

-장그래가 오 차장의 회사에서 제 2의 출발을 한 것은 독자들에게 위안이 됐을 겁니다.
"장그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오 차장과 김 대리입니다. 두 사람이 장그래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들을 얻는다는 건 회사보다 더 큰 재산일 수 있습니다."

-뻘게진 눈으로 일만 하는 오 차장에 감정을 이입 한 직장인들도 많습니다. 부하들이 좋아하는 상사인데 회사에선 같이 가기엔 껄끄러운 직원으로 묘사됐습니다.
"회사에선 피곤한 사람이죠. 오 차장 같은 캐릭터가 필요한 게 '일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일이라는 게 직장인에게 무엇인가. 돈만 받으면 끝인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질문을 해보면서 스토리를 써본 것 같아요."

-오 차장이 조직 내에 남을 순 없었나요?
"퇴사가 답은 아니겠으나, 그 팀에서 이미 한 일이 있고, 그러다 보니 더 있을 수 없는 거죠. 독자나 자기 작품 원하는 사람들 충족시키기 위해 창작자가 게임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요. 스토리 진행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죠. 그리고 오 차장에게 있어선 무대가 달라졌지 일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오 차장과 장그래를 따라 원 인터내셔널을 퇴사한 김동식 대리야 말로 판타지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판타지입니다. (웃음) 김대리는 장그래로 인해 화학작용을 거친 것이죠. 대학도 안 나온 친구가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고, 건전하고 진실성이 있는 걸 목격한 거죠. 장그래가 그만두고 점수가 제일 좋은 인턴이 들어왔는데, 참 아이같이 그려졌어요. 그걸 보면서 김대리는 '스펙이란 뭘까, 일을 한다면 오 차장, 장그래와 하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았을까 했죠."

-여성 직장인들은 '워킹맘' 선 차장에게 크게 공감했습니다.
"맞벌이 부부 선 차장 이야기는 제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과 독자가 생각하는 것과 강도의 차이가 있었어요. 이런 경우도 있다 싶은 에피소드로 생각했다가, 댓글을 보고 나중에 무게감이 달라졌습니다. 맞벌이 부부 이야기를 농담같이 다뤄선 안 되겠다 싶었죠. 비중이 더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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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로 많이 꼽히는 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입니다. 윤 작가가 생각하는 명대사가 있습니까.
"조치훈 9단이 말한 '어차피 바둑, 그래도 바둑' 입니다. 나 하나 지구에 있건 없건 영향은 없겠지만, 개인에게는 전부잖아요?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거죠."

윤 작가가 언급한 대사는 67수에 나온다. 조치훈 9단에게 누군가 "왜 이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라고 물었다. 조 9단의 대답은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였다. 이 이야기를 떠올린 장그래는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미생을 통해 정말 작가가 처음부터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인가요?
"목격한 걸 그리자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목격한 걸 그리면 내 독자들도 자신을 타자화 시켜서 내 만화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한 거죠. 그 다음은 독자들의 몫이죠. 감히 제가 직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생각은 없어요. 독자들이 저보다 더 많이 배우고 사회생활을 했으니까요. 내가 목격한 걸 소박하게 풀자고 한 거죠."

-내년 가을 '미생 시즌 2'를 연재한다고 예고했습니다. 무슨 내용이 그려지나요?
"퇴근 시간이 따로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법인이지만 자영업자 같은 업체가 무대니까요. 개인사업자들의 본격적인 얘기가 나올 것이고, 그들은 전 직장 원 인터내셔널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장그래의 입사동기들도 계속 나올 테죠. 요르단에서 장그래가 하는 일도 한 에피소드로 나옵니다."

-장그래의 사랑이야기도 나오나요?
"아무래도 캐릭터들이 나이를 먹어가게 되니까 그렇죠. 하지만 상대방이 안영이가 될 거라고는 단언할 수는 없어요. 장그래에게 안영이는 현실감 있는 대상이 아니죠. 작품 자체가 판타지를 다루고 있어 디테일도 판타지에 의존하면 막가는 거죠."

윤 작가는 온·오프라인에 연재 중인 '인천상륙작전'을 마치면 내년 초부터 신안 앞바다 보물선 도굴꾼들의 이야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올 연말 극지연구소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구의 최남단 남극에 간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한 달 반가량 머물며 남극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할 계획이다.

"'인천상륙작전' 연재하고 12월 말에 남극 가서 2월 초에 올 예정입니다. 그 후에 신안 앞바다 보물선 도굴꾼 이야기를 그리고, 그 후에 '미생 2'를 할 예정입니다. 신안 앞바다 도굴꾼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굴 기획자입니다. 영화계에서 벌써 제안이 오고 있습니다. 도굴꾼과 건달, 잠수부, 구매자 등을 두루두루 다룰 예정입니다. 남극 이야기는 처음에는 여행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직은 구체화된 것이 없습니다."

또 윤 작가는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 씨와 손잡고 만화 웹진 '에이코믹스'를 창간한다. '에이코믹스'는 '모든'을 뜻하는 영어 'All'과 만화 'Comic'의 합성어로, 만화 전문 잡지를 표방한다. 리뷰와 기사를 통해 웹툰 등 만화 작품을 깊이 있게 조명할 계획이다.

끝으로 윤 작가는 1년 반 동안 '미생'을 사랑해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항상 마감을 기다려 주시고,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흥미로운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작품 할 수 있는 튼튼한 받침대 얻은 기분입니다. 다음 작품 더 노력해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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