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종이 접어 산자락에 살포시… 장욱진화백 ‘호작도’가 꿈틀대는듯

  • 동아일보

경기 양주 ‘장욱진미술관’ 최근 완공… 부부건축가 최성희-페레이라 설계
내부 들어서면 예측불가 공간 즐비… 장화백 동심적 상상력 떠오르게 해

위에서 내려다본 장욱진미술관. 뒷산에서 물을 찾아 개울가로 내려온 동물을 닮았다. 설계자들은 “‘호작도’를 포함해 장욱진 화백의 여러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박완순 작가 제공
위에서 내려다본 장욱진미술관. 뒷산에서 물을 찾아 개울가로 내려온 동물을 닮았다. 설계자들은 “‘호작도’를 포함해 장욱진 화백의 여러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박완순 작가 제공
장욱진미술관은 ‘전통 미술의 현대화’를 이룬 1세대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 그림을 닮았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계명산을 배경으로 개울물가에 자리한 미술관은 흰 종이를 이리저리 접어 산자락에 펼쳐 놓은 듯 미니멀한 디자인의 건물이다. “나는 심플하다”고 선언하며 단순한 선 몇 개로 소박한 풍경을 즐겨 그리던 고인의 작품 속 시골집 같다. 화가의 ‘호작도(虎鵲圖)’를 떠올리며 미술관을 보면 뒷산에서 목을 축이러 물가로 내려온 호랑이를 닮은 것도 같다.

장욱진미술관 설계에 영감을 준 ‘호작도’(1984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장욱진미술관 설계에 영감을 준 ‘호작도’(1984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장욱진의 그림에서 출발했어요. 그가 그린 집, 사람, 동물, 나무, 해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조형적 구성이 치밀하죠. 저희도 단순한 선으로 공간감이 느껴지는 미술관을 설계하고 싶었어요.”(최성희 최-페레이라건축 소장)

“(한국 전통 건축처럼) 이건 내 건물, 하고 선을 긋지 않고 풍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디자인은 모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욱진은 현대 화가잖아요. 그의 그림은 마르크 샤갈의 그림과 닮았어요.”(로랑 페레이라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

미술관을 함께 설계한 부부 건축가인 최 소장과 페레이라 교수는 “‘이게 디자인이다’라고 과시하지 않는, 모뉴먼트(기념비)가 되지 않는 설계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했다.

장욱진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총면적 1851.58m²) 규모로 양주시가 국비와 시비 76억 원을 들여 지은 시립 미술관이다. 양주시는 유족들이 고인의 작품 232점을 기증하면 내년 4월 개관할 예정이다.

최근 완공된 미술관을 부부 건축가와 함께 둘러봤다. 철근콘크리트에 흰색 폴리카보네이트 패널로 외벽을 마감한 미술관의 외관은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다 달라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전경을 보려면 인근 청련사에 올라 멀리 내려다봐야 한다.

직각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부정형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예측 불가능한 공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안쪽 벽면의 크기와 높이도 모두 다르다. 다양한 크기의 그림을 전시하기에 좋을 듯하다. 중정으로 낸 창 말고도 벽면 곳곳에 창을 크게 내어 주변의 풍광을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여느 미술관과 다른 점이다.

1, 2층을 터놓은 공간에서 2층 계단으로 오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까와는 다른 눈높이에서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2층에 오르면 뾰족지붕 아래 아늑한 다락방 같은 공간들이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낸다. 장욱진 화백의 동심적 상상력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 구성이다.

이 밖에 강의실 2개와 수장고, 카페, 사무실과 회의실이 있다. 공간을 잘게 쪼개놓아 건물의 덩치는 커 보이지 않지만 내부 공간이 좁지는 않다.

‘최-페레이라 건축’으로 함께 활동하는 최성희 소장(왼쪽)과 로랑 페레이라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 부부 건축가의 장점에 대해 최 소장은 “서로 솔직하게 비판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페레이라 건축 제공
‘최-페레이라 건축’으로 함께 활동하는 최성희 소장(왼쪽)과 로랑 페레이라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 부부 건축가의 장점에 대해 최 소장은 “서로 솔직하게 비판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페레이라 건축 제공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의 장 누벨 설계사무소에 근무하던 페레이라 교수는 장 누벨의 서울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2005년부터 서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 소장과는 2005년 서울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공모전을 함께 준비하면서 가까워졌고 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뒤 설계사무소 ‘최-페레이라 건축’을 세워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선 ‘페 선생’으로 불리는 페레이라 교수는 국내 대학 교직 경력도 8년이 넘는다. 그는 “예전엔 학생들이 ‘copy, obey, memorize(베끼고, 복종하고, 외우기)’만 했는데 요즘은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또 “한국엔 좋은 건축가가 많음에도 건축물이 못생긴(ugly) 것은 미스터리”라며 좋은 제도가 없기 때문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 공공 미술관을 설계했어요. 그것으로 제 서울 생활은 이미 해피엔딩입니다.”

양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장욱진#최성희#페레이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