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비바크, 山의 일부가 되는 황홀한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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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산 현장체험으로 본 비바크의 매력과 준비 가이드

19일 밤 12시, 인천 계양구 계양산 정상에서 이동욱 씨가 자신의 1인용 텐트를 펼치고 비바크를 즐기고 있다. 그는 비바크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일 밤 12시, 인천 계양구 계양산 정상에서 이동욱 씨가 자신의 1인용 텐트를 펼치고 비바크를 즐기고 있다. 그는 비바크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짐을 보아하니 ‘비박’ 하시게?”

19일 오후 6시, 인천 계양구 계양산 등산로 입구의 가게에서 계란, 오징어포, 생수 등을 주워 담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선뜻 ‘비바크(biwak·일명 ‘비박’)’란 말부터 꺼냈다. 남들은 산을 내려오는 해질녘에 산행을 준비하는 사내들이라니…. 게다가 결코 높지 않은 계양산(해발 395m)을 오르는데 거대한 등산용 배낭에 먹을 것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한눈에 비바크 온 등산객으로 짐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낮은 산에도 비바크 하는 사람들이 많나요?”

“물론이죠. 정상에 오르면 경치가 얼마나 좋은데.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새벽 풍광도 이루 말할 수가 없고.”

등산 전문가들은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는 5월을 진정한 비바크의 계절로 부른다. 초심자들도 큰 위험 없이 ‘산중노숙’의 매력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바크는 지금 대한민국 등산 마니아들의 관심과 인기가 집중되는 핫 트렌드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해외 고산 등반 훈련을 하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던 비바크는 아웃도어 열풍 속에 산을 진정으로 즐기는 방법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런데 비바크란 용어는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자면 기자 역시도 비바크란 단어가 독일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2년 전에야 깨쳤다. 그전에는 ‘비박(非泊)’이라는 한자어로 생각했다.

한자가 아닌 독일어에서 유래

흔히 비박이라 부르는 ‘비바크’란 말은 독일어에서 왔다. 군대가 야영을 할 때 경계병이 적의 침입을 감시하며 밤을 지새우는 것에서 유래(Bi·주변+Wache·감시하다)했다고 한다. 유럽 어휘가 한국에 들어온 탓에 여러 단어와 발음이 뒤섞여 쓰여 왔다. 프랑스식 말인 ‘비부아크(Bivouac)’는 물론이고 한때 ‘비백’이라는 발음으로도 통했다.

발음이야 어찌됐든 지금은 산에서 텐트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비바크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산행의 짐을 간소화하기 위해서나 자연을 좀 더 가깝게 느끼기 위해 비바크를 택한다. 최근에는 간단한 1인용 텐트를 사용하는 것까지 비바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서울 용산구에서 스포츠용품 관련 사업을 하는 이동욱 씨(34)는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2005년 동료들과 함께 등산과 캠핑을 접하고 그 매력에 푹 빠졌다. 그러다 2008년 이후엔 자연스럽게 비바크 마니아가 됐다. 그는 “산을 오르면서 등산 스타일이 변하게 됐고, 그 와중에 비바크를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등산을 시작한 초기에는 전국의 명산을 주로 오르내렸고, 가끔 친구들과 캠핑을 하며 야외활동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여러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점차 왁자지껄한 산행보다는 자연을 좀더 가까이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고즈넉한 시간을 갖고 싶어지더라고요.”

이 씨는 드디어 2008년 강원도의 한 산에서 비바크를 처음 접하게 됐다. 그의 일행은 일출을 보기 위해 오전 4시에 산장에서 출발해야 했다. 어둠을 뚫고 전진해야 하는 새벽 산행은 쉽지 않았다. 반면 비바크를 택한 이들은 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일찌감치 일출 감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점이 부러워 비바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산행을 준비하는 과정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장비를 더 꼼꼼하게 챙기게 됐고 자연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늦은 밤의 절대 고독과 아무도 오가지 않는 낯선 길의 정취, 그리고 새벽의 찬란한 태양과 황혼녘의 따뜻한 햇살…. 이후 단체 행렬을 쫓아가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자연의 은밀한 속살을 비바크를 통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됐다.

비바크를 즐기다 보니 이름 높은 명산이 아닌, 동네 이름 없는 작은 산의 매력에도 주목하게 됐다. 겉보기엔 낮고 볼품없는 산이라도 비바크를 통해 바라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은밀한 매력이 드러났다. 이 씨는 그렇게 집 주변에서 시작해 지방의 이름 없는 산을 섭렵하며 자신만의 비바크 노하우를 쌓아갔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등산객들은 비바크에 관해서만큼은 커다란 축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등산객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들짐승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곰이 야영지에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우리나라는 야생동물 때문에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낮다. 게다가 웬만한 등산로 주변에는 등산객들의 이동이 잦아 쉽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비바크는 낭만적이기도 하다. 산속에서 ‘별바라기’를 하며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씨 역시 그런 경험이 매우 소중하다고 말한다.

“땅을 침대 삼고 하늘과 별을 이불 삼아 잔다고 하잖아요. 비바크는 공간적 제약에 덜 구애받으면서 마음껏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급자 이상의 등산 애호가에게 꼭 한 번 권하고픈 산행 방식입니다.”

그렇지만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한다. 자연이란 종종 인간의 예측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특히 ‘나 홀로 비바크’에 나서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준비가 필요하다. 게다가 대부분 명산에서는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취사 및 야영 행위가 금지돼 있어 미리 적당한 장소를 찾아놓는 게 좋다.

▼ 밤의 고독-찬란한 일출 중독성 강해… 작은 산도 환상적 ▼

비바크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선 ‘준비 또 준비’


이 씨가 즐겨 찾는다는 계양산에 동행해 그의 비바크 노하우를 엿보기로 했다. 계양산은 김포공항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원추형의 산이다. 도심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인천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오르기 쉬운 산으로 꼽힌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많은 등산객이 몰린다.

보통 등산객들은 계양산 정상에 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내려온다. 하지만 비바크를 염두에 둔 이들이라면 산행 시간에 그다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오전에 산에 올라 여기저기를 여유롭게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도 되고, 오후 늦게 산에 올라 일몰을 감상하고 밤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양산 정상에 올라 바람막이 셸터를 치고 몸을 뉘었다. 체력은 바람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회복됐다. 원래 비바크는 제대로 된 숙박을 한다기보다는 잠시 몸을 쉬면서 다음 산행을 위해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보온병에 준비해 온 뜨거운 물로 커피를 타 주변 등산객들에게 돌리며 인사를 나누니 분위기가 한결 정겨워졌다.

비바크 장소는 다른 등산객의 산행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면 어디든 괜찮다. 그 대신 처음 가는 곳일 경우 전문가나 등산 커뮤니티의 정보를 참고해 어디가 적절한 지점이란 것 정도는 숙지하고 출발해야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텐트가 없을 때는 판초우의로 지붕을 만든 다음 그 아래 커버를 씌운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런 간단한 지붕만으로도 한기와 습기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날이 좋을 때에는 지붕 없이 비닐 또는 침낭 커버만 사용해도 된다. 전문가들은 요즘 많이 나오는 1kg 이하 1인용 텐트의 활용을 추천한다.

높이 395m의 계양산에서도 자정이 되자 일기의 변화가 심했다. 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이 몰아닥쳤다. 구름이 지나가니 순식간에 날씨가 갰다. 김포공항에서 계양산에 이르는 너른 평야의 불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 씨와 취재진은 비좁은 바람막이 셸터에서 비바크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새벽에 하산했다. 새벽부터 계양산을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비바크 하고 오시나 봐요. 멋진 추억 만드셨죠?”

비바크 마니아인 이동욱 씨의 배낭에서 나온 등산 용품들. 최소한의 장비로 최대한의 성능을 끌어내는 것이 비바크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비바크 마니아인 이동욱 씨의 배낭에서 나온 등산 용품들. 최소한의 장비로 최대한의 성능을 끌어내는 것이 비바크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비바크 마니아의 용품을 보니 ▼

비상 랜턴-배터리 챙기기 1순위… 장소 미리 체크하고 의류-약 준비


1인용 텐트, 타프(Tarp·방수포), 침낭, 에어매트, 랜턴, 미니테이블, 버너, 라디오 겸 스피커, 코펠, 수저, 컵, 드라이백(방수백), 비상속옷(방수의류, 갈아입을 옷, 양말 및 보온의류), 가스, 헤드랜턴, 상비약 및 구급키트, 의자, 담요, 스틱, 지도….

이동욱 씨의 배낭에서 나온 비바크 용품들이다. 그가 꾸린 배낭은 80L 크기, 식수까지 넣은 무게는 18kg이었다. 비바크에서는 짐을 줄이는 게 관건이다. 특히 식수와 비상식량까지 꼭 휴대해야 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릴 경우 산행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

비바크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무엇보다 비상용 랜턴과 배터리다. 불빛이 없다면 생존에 심각한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심야의 산속은 습도가 높고 온도는 낮아 예상보다 빠르게 배터리가 닳는다. 여유분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비상용 의류도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등산은 더위와의 싸움이지만 비바크는 추위와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체온보호용 담요와 바람막이 외에 따뜻한 보온용 겉옷을 휴대해야 하는 이유다.

습기에 속옷이 젖을 경우에 대비해 예비용 속옷도 준비해야 한다. 이 밖에 휴대전화 배터리나 비상용 상비약도 챙겨가는 게 바람직하다.

쉽게 접고 펼 수 있는 간이의자는 편의성과 함께 비바크의 품격을 크게 올려주는 아이템이다. 요즘엔 가볍고 작은 제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일몰·일출시간을 미리 확인해 두면 여정에 안전은 물론이고 낭만까지 더할 수 있다.

비바크 장소를 정할 때는 허용 여부를 미리 확인해두는 게 좋다. 도립·국립공원에서는 원칙적으로 지정된 장소 외에서는 비바크를 할 수 없다. 다만 긴박한 경우 침낭에 비닐 하나 정도 덮는 비바크는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캠핑장비를 쓰거나 지붕을 만드는 행위는 단속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산에서의 흡연은 명백한 범죄행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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