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브라이틀링 제트기 탑승, 비행체험 환상의 순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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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 치솟자 머릿속 피가 목 밑으로 쏠렸다

“일단 비행을 시작하면, 조종간 말고 주변 경치를 보세요.” 이륙 전 안전교육의 마지막 당부는 ‘즐기라’는 조언이었다. 1일 오전 경기 수원을 출발한 브라이틀링 제트팀의 L-39C 제트기가 안산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후방 좌석에 앉은 사람이 본보 권기범 기자다. 브라이틀링 제공
“일단 비행을 시작하면, 조종간 말고 주변 경치를 보세요.” 이륙 전 안전교육의 마지막 당부는 ‘즐기라’는 조언이었다. 1일 오전 경기 수원을 출발한 브라이틀링 제트팀의 L-39C 제트기가 안산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후방 좌석에 앉은 사람이 본보 권기범 기자다. 브라이틀링 제공
이제 하늘을 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여객기를 탈 수도 있고, 글라이더를 타거나 스카이다이빙을 해도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비행이 있다. 바로 제트기에 오르는 일이다. 선바이저가 달린 헬멧을 쓰고 캐노피 아래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뒤 활주로를 날렵하게 박차고 날아오르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일 오전 경기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야외 주기장(駐機場·비행기를 세워 두는 곳)에 브라이틀링 제트팀의 체코산 L-39C 알바트로스 제트기 7대가 나란히 섰다.

지난해 11월부터 중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을 순회하는 아시아 투어 일정 중 하나로 ‘2013 경기안산항공전’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온 비행기들이다. 이들은 본격적인 에어쇼 무대를 앞두고 기자와 일반인 등 6명(나머지 한 대에는 촬영 요원이 탑승한다)의 제트기 탑승 체험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여러분은 평생 한 번 해보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브라이틀링 제트팀의 리더인 자크 보틀랭 씨가 말했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브라이틀링 제트팀이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 데다가 일반인이 여객기가 아닌 제트기, 특히 에어쇼를 위한 곡예비행팀의 비행기에 동승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이번 주 동아일보 ‘렛츠’는 독자들에게 제트기 탑승 체험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항공 멀미용 봉투를 이용하세요”

오전 9시 50분, 후방 좌석에 기자를 태운 8호기가 비행장의 유도로(항공기의 이동을 위한 공간)를 가로질러 활주로 시작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기자와 함께한 조종사는 프랑스 출신의 샤르보넬 베르나르 씨. 그는 비행 중 사용하는 콜사인이 ‘샤르보’인 프랑스 출신 베테랑 조종사다. 본래는 2호기를 조종하지만, 이날은 정비작업을 위해 입고된 2호기 대신 예비기인 8호기를 조종했다.

이동하는 제트기 대열을 향해 F-5 전투기를 정비하던 한국 공군의 항공정비사들이 멀리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샤르보도 그들을 향해 왼손 엄지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엄지손가락을 드는 것은 ‘오케이’를 나타내는 수신호임과 동시에 ‘안전하고 멋진 비행이 되길 바란다’는 행운의 기원이기도 하다.

브라이틀링 제트팀 조종사들은 짧게는 5500시간에서 길게는 1만50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졌고, 2003년 창립한 이후 26개 나라에서 400여 회에 걸친 공연을 펼쳐온 베테랑들이다. 하지만 작은 실수나 방심은 언제나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은 국경에 관계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관들은 체험자들에게 제트기 탑승 전 안전교육 내용을 숙지할 것을 요구했다. 교육은 그 대상이 훈련 경험이 없는 일반인들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했다.

기체에 오르는 자세와 순서, 손을 대야 하는 곳, 발을 디딜 장소까지 모두 정해져 있었다. 비상탈출용인 빨간색 레버와 랜딩 기어, 캐노피 분리 버튼에는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일단 좌석에 앉으면 양손은 허벅지나 안전띠에 올려둔 채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손은 정비사나 조종사의 말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양발은 좌석 쪽으로 바짝 당긴 채로 고정해야 한다. 앞좌석 조종사의 발을 이용한 조종 동작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한 기자의 눈앞에 웬 흰색 봉투가 눈에 띄었다. 첨단 기계가 가득한 기체에 어울리지 않는, 집게에 물려진 흰 봉투라니. 기자를 도와주던 정비사가 말했다.

“가끔 멀미를 하는 체험자들이 있죠. 그때 쓰라고 마련한 ‘항공 멀미용 종이봉투’입니다. 비행 즐겁게 하세요.”
브라이틀링은 정교한 기술 덕분에 항공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1일 오전 브라이틀링 제트팀 항공기들이 비행체험을 위해 활주로 끝으로 이동하는 모습. 안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브라이틀링은 정교한 기술 덕분에 항공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1일 오전 브라이틀링 제트팀 항공기들이 비행체험을 위해 활주로 끝으로 이동하는 모습. 안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항공기와 시계의 정밀함, 브라이틀링 정체성이 되다 ▼


3G(중력의 3배)를 느끼다

체험비행은 활주로를 출발해 경기 안산시까지 갔다가 다시 제10전투비행단 활주로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20여 분 동안의 비행 중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3G의 압박을 느꼈던 때였다. 3G는 평소 지상에서 느끼는 중력의 3배에 이르는 압박이다. 첫 번째 압박을 안산에서 수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체를 선회할 때, 두 번째는 비행기들이 순서대로 착륙하기 위한 위치를 잡을 무렵 기자가 탄 제트기가 급상승했을 때 느꼈다.

선회할 때의 압박은 서서히 가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안했다. 하지만 급상승 기동 때는 달랐다. 순식간에 기체가 하늘로 솟구치자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검은 기운이 서렸다. 동시에 머릿속의 피가 모두 목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 시간 바닥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을 때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느낌과 비슷했다. 비행 중 봤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잊을 만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안전교육 시간에 들었던 “중력가속도가 느껴질 때는 가볍게 배에 힘을 주면 된다”던 교관의 설명이 떠올랐다. 배에 힘을 꽉 주자 곧 눈앞이 밝아지며 정신이 들었다. 헬멧의 스피커를 통해 “괜찮으냐(Are you OK)”고 묻는 샤르보의 질문에 겨우 “괜찮다”고 답할 수 있었다.

배에 힘을 주라는 주문은 ‘긴장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조종사들이 실제 비행 때 겪는 두뇌의 혈액 공급 부족 상황을 막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조종사들은 실제 비행을 할 때 최대 8∼9G의 하중을 견디며 비행을 한다. 8∼9G의 상황에서는 우리 몸의 피가 하체로 쏠리는데, 이때 뇌에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면 조종사가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조종사들은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혈액을 뇌로 강제로 끌어올리는 특별한 호흡법을 익힌다. 그래야 공중에서 겨우 3m의 간격을 유지하며 아찔한 곡예비행을 펼칠 수 있다.

기자가 겪은 잠깐의 아찔함은 조종사들이 겪는 압박에 비하면 ‘애교’였던 셈이다.

7명의 파일럿들(왼쪽)은 1일 오후 ‘2013 경기안산항공전’에 참가해 아찔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브라이틀링 제공 안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7명의 파일럿들(왼쪽)은 1일 오후 ‘2013 경기안산항공전’에 참가해 아찔한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브라이틀링 제공 안산=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경기안산항공전에서 다시 만난 제트팀


체험 탑승이 끝난 뒤 오후 시간에 알바트로스 제트기들을 다시 만난 곳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사동의 ‘2013 경기안산항공전’ 행사장이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 행사였던 브라이틀링 제트팀의 에어쇼 현장에는 10만여 명의 관객이 몰렸다.

제트팀은 꼬리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다양한 포메이션을 선보였다. 양쪽에서 전속력으로 날아오던 제트기들이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켜 갈 때는 관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트팀의 포메이션과 퍼포먼스는 모두 시계 브랜드인 브라이틀링의 제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4대의 제트기가 최대한 가까이 붙어서 비행하고, 뒤따라오는 1대의 제트기가 그 둘레를 꽈배기처럼 회전하며 따라오는 ‘트랜드오션 크로노그래프 유니타임 포메이션’은 리더인 보틀랭 씨가 고안한 것이다. 브라이틀링 시계 ‘트랜스오션 크로노그래프 유니타임’의 현대적인 디자인과 다이얼 위 지구 모양의 패턴에서 보이는 디테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7대의 제트기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크로노맷 포메이션’에는 브라이틀링이 자체 개발한 무브먼트를 장착한 시계 ‘크로노맷 44’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면을 담았다.

제트기들이 별 모양으로 모여 함께 커브를 도는 ‘슈퍼오션 포메이션’은 다이버를 위한 시계 ‘슈퍼오션 크로노그래프 M2000’의 강인한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을 장식한 ‘파이널 스플릿’이었다. 7대의 기체가 지면과 수평으로 날아오다가 일시에 일곱 방향으로 각각 흩어지며 폭죽을 터뜨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화려한 자태를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계 브랜드가 제트팀 운영하는 이유는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시계 브랜드인 브라이틀링이 세계 유일의 민간 전문 제트팀을 운영하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한 번 이착륙할 때마다 드는 항공유와 기체의 유지보수 비용, 베테랑 조종사의 인건비 등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팀을 운영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브라이틀링 관계자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제트팀 운영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1884년 레옹 브라이틀링이 창립한 브라이틀링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브라이틀링이 1915년 개발한 손목시계용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때문이었다. 일종의 스톱워치인 크로노그래프는 당시 비행기 파일럿들의 필요에 따라 개발됐다.

브라이틀링은 이 기술을 계속해서 발전시켰고, 1939년 영국 공군의 공식 시계 제조업체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1942년 브라이틀링은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의 기준’이라고 평가받는 시계 ‘크로노맷’을 내놓아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에도 브라이틀링의 정체성은 꾸준히 유지됐다. 1952년에는 ‘파일럿의 시계’로 불릴 만큼 조종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시계 ‘내비타이머’를 출시했다. 조종사들은 내비타이머를 이용해 비행에 필요한 거리와 평균속도, 환율 등을 계산할 수 있었다.

내비타이머는 1956년 미국 항공기소유주·조종사협회(AOPA)가 선정한 공식 시계로 인정받기도 했다.

생명을 구하는 시계라고 불리는 ‘이머전시 미션’도 이런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제품이다.

항공 조난 시 121.5MHz의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미니 송신기가 내장돼 있어 항공 전문가뿐만 아니라 안전을 중시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이머전시 미션은 ‘절대 장난 삼아 안테나를 뽑지 않겠다’는 내용에 동의해야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이기도 하다.

수원=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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