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죽음의 땅 체첸서 일어난 살육의 참상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더러운 전쟁/안나 폴릿콥스카야 지음/주형일 옮김/266쪽·1만6000원 이후

재미없다. 고생한 출판사 분들껜 미안하다. 근데 처음 몇 장은 진짜 그랬다. 원래 글이 그 모양인지, 번역이 문제인지. 뚝뚝 끊기고 개운치가 않았다. 서평 쓸 책을 바꿀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30분을 버티니(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금세 그런 선입견이 부끄러워졌다. 잠깐 저자 사진을 보며 사과도 했다. 아, 글재주나 부리는 따위의 책이 아니구나. 분명 읽는 맛은 떨어진다. 하지만 이건 소설 나부랭이가 아니다. 시대의 기록이다. 죽음의 땅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을 대변해 싸우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사투다.

저자는 제2차 체첸 사태(1999∼2000년)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한 러시아 여기자. ‘더러운 전쟁’은 당시 그가 시사주간지 노바야가제타에 썼던 칼럼을 묶은 책이다. 러시아와 체첸의 충돌은 수천 명이 사망하고 4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하는 피해를 남겼다. 이때 보도로 저자는 ‘반(反)정부 인사’로 낙인찍혀 군인에게 총칼로 위협받았으며, 독극물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2006년 암살자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저자가 볼 때, 전쟁은 정부 수뇌와 일부 정치가의 야욕만 채우는 짓이다. 칼럼에서 고발한 체첸 그로즈니 양로원 사태를 보자. 정부 지원도 끊기고 노인들만 남아 겨우 연명하던 이곳에 어느 날 폭격이 예고됐다. 저자는 러시아와 체첸 정부 관계자를 만나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러시아 담당자는 자신들이 저지른 부정을 숨기려 양로원이 폭격되길 원했다. 체첸 측은 이를 빌미로 러시아를 압박하려 피신을 가로막았다. 그들에게 민간인 목숨이란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단지 정권을 유지하고 강화할 명분과 이득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와 별 상관없는 얘기일 수 있다. 10년도 지난 타국 분쟁에 가슴이 쿵쾅거리길 요구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이 땅도 겨우 60년 전 전쟁을 겪었다. 그때 세상이 외면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됐을까. 전쟁이 앗아가는 덧없는 희생은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더러운 전쟁’은 그 진실을 무겁게 일깨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