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웹툰 대박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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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작가와 김양수, 그들은 어떻게 웹툰 유명작가로 떴나

“남들은 제가 손쉽게 행운을 거머쥔 것이라고 착각해요” 스물네 살 웹툰 작가 정솔 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마음에 춤어온 만화가의 꿈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봤다고 말한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남들은 제가 손쉽게 행운을 거머쥔 것이라고 착각해요” 스물네 살 웹툰 작가 정솔 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마음에 춤어온 만화가의 꿈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봤다고 말한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웹툰(인터넷 만화·Web+Cartoon) 작가들이 TV광고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요즘 대형 서점의 신간 사인회 주인공은 상당수가 웹툰 작가다. 대박을 친 웹툰의 스토리에 영화사와 출판사들이 군침을 삼킨다. 모바일 메신저에선 만화캐릭터가 채팅의 도구로 쓰인다. 오늘날 웹툰 작가의 위상은 1970, 80년대 신춘문예 등단작가의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도 있다.

급작스러운 변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웹툰이란 게 기존의 만화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작업환경이 디지털로 변했고 인터넷에서 먼저 공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변화가 불러온 결과는 엄청나다. 이전보다 수십, 수백 배나 많은 독자가 인터넷에서 만화를 즐기고, 수천 명이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자연스레 웹툰 작가는 청소년들에겐 ‘꿈의 직업’이 됐다.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웹툰 작가 데뷔의 문을 두드린다.

여기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한 명은 20대 초반의 여성이고 또 한 사람은 40줄에 접어든 중견 작가다. 이들의 작품은 엄청난 팬덤을 거느리고 있으며, 다양한 미디어를 아우르는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원천이 된다. 두 사람의 인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온 과정과 미래는 천양지차다.

#1. 소녀 이야기

누군가 묻는다. “고등학교 시절엔 도대체 뭘 하신 건가요?”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가녀린 여성 작가는, 의외로 하드하게 답한다.

“써드플레이스, 써코, 아카 같은 만화 동호인 행사장(흔히 ‘동인 행사’라고 함)에서 제가 만든 만화를 팔았어요. 데뷔를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거든요.”

“네?” 눈치 없는 질문자는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행사명은 무엇이며, 또한 여고생이 어떻게, 어떤 만화책을 만들어 팔았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기자는 여의도나 강남의 박람회장 부근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 복장을 한 일군의 청소년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동인 행사란 그런 만화 애호가들의 모임일 텐데. 그런데 진짜 책을 만들었을까, 복사를 해서 돌렸다는 뜻일까?

“왜 그거 있잖아요. 만화동인지를 만들기 위해선 충무로 인쇄골목에 가서 원본을 필름으로 만들고 오프셋 인쇄를 해 떡제본을 하잖아요. 그렇게 공책 같은 만화동인지를 100부씩 만들어 3000원씩에 팔며 용돈벌이하고 그랬다고요.”

이쯤 되면 깜짝 놀라 다시 되묻기 마련이다.

“아니, 고등학교 1학년이 직접 자가 출판을 했다는 건가요?”

“그럼요. 한 30권 이상 만들었을 거예요. 고3 땐 몇천 부도 팔며 제법 큰돈도 벌었다고요.”

▼ 초작가 고교때 30권 자가출판, 김양수 논픽션으로 ‘공감의 神’ 올라 ▼

20대 청춘의 속이 꽉 찬 이력서

필명은 ‘초(超)’, 본명은 정솔. 그래서 ‘초 작가’다. 1989년생이니 올해 24세,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3학년 휴학 중이다. 대중이 단박에 알아챌 만한 이력이란, 얼마 전 한 포털사이트에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란 웹툰을 1년 10개월간 연재했다는 것이다.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웹툰은 애묘인과 애견인들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남성적이란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압도적인 여성 취향의 가슴 따뜻한 작품이다.

연재를 종료한 날이 며칠 전인 19일이었기에 만남이 가능했다. 한창 작업 중인 인기 만화가들은 접촉하기가 간단치 않다. 불규칙한 생활리듬 탓이다. 작가의 DNA 속에는 낮보다 밤에 정신이 명료해지는 올빼미 유전자가 숨어 있는 법. 초 작가 역시 줄곧 오전 9시에 잠들었다고 했다. 연재가 끝난 지금도 새벽에 깨어 있는 것은 여전하다. 자신의 세 번째 책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웹툰을 책으로 옮긴 시리즈의 1권과 2권은 진즉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출간 기념 저자 사인회는 여성 팬들로 북적였다.

“위가 상해서 커피를 못 마셔요.”

어렵사리 끌어낸 24세 숙녀의 입에서 벌써부터 직업병에 대한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웹툰 메이저리거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 “예술중학교와 예고를 나왔어요. 당연히 대학은 시디과(시각디자인과)를 택했고요. 만화를 꿈꾼 이들은 대개가 시디과에 가요. 원래는 애니고(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일본에 가서 활동하는 게 꿈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아버지는 무역 일을 하는 얼리어답터였다. 외동딸에게 최대한의 미디어적인 혜택을 베풀었다. 486컴퓨터가 나오자마자 초등학생인 딸에게 사서 안겼다. 딸은 자연스레 PC통신과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만화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다. 최신형 휴대전화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신형 휴대전화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딸아이의 손에 가장 먼저 쥐여 줬다.

“제가 외동딸이라 그러셨을 거예요. 만화책에 대해서도 너그러우셨죠. 게다가 우리 세대는 아주 어릴 적부터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접했기 때문에 새로운 장르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쑥쑥 흡수할 수 있어요.”

“결국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

어릴 적부터 소녀의 꿈은 만화가였다. 과자 사먹을 돈으로 일찌감치 헌책방에 가서 일본 만화책을 사 모았다. 1997년 일본문화 개방과 함께 만화는 청소년층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매체가 돼 있었다.

소녀는 일찍부터 창작노트를 만들어 스토리를 발굴하고 콘티를 짰다. 아버지가 첫 독자가 돼 줬다. 지금 그녀가 그리는 모든 만화의 원초적 구상들은 중학교 시절 창작노트에서 비롯됐다. 지금도 고향집에는 소녀의 키 높이만큼 쌓인 콘티북과 습작노트가 남아 있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반대했다. 대중작품에 빠진 딸에게 “만화가는 작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서양화가를 추천했다. ‘만화가의 사회적 처우’에 대한 어머니의 촌평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원하는 작가상도 일부분 받아들여야 했다. 애니고를 포기하고 명문 예고에 진학한 순간 대학 진학이란 부담감이 발목을 잡아챘다.

다급함을 느꼈다. 함께 만화동호회 활동을 한 친구들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만화가의 꿈을 이뤄가고 있는 순간, 그냥 예고 학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억울했다. 어떻게든 만화가로 변신하자고 다짐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미친 듯이 ‘1인 출판’에 도전한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PC통신 동호회를 통해 얼마든지 익힐 수 있었다. 정성스럽게 도안을 하고 그림에 색을 입힌다. 말풍선 안의 대사는 프린트를 해서 채워 넣는다. 어느 정도 책 분량이 완성되면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책으로 제작한다. 이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판매하거나 만화축제에서 좌판을 깔고 동호회원들에게 팔아가며 실력을 검증 받는다….

25만 원을 들여 100권을 제작해 3000원씩에 팔면 5만 원이 남았다. 이렇게 한다고 진짜 만화가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데뷔를 했다. 현역 웹툰 작가의 절반 이상이 이런 무명 시절을 거쳤다.

2008년 대학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한 내적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다. 각양각색의 그림체를 배우고 익혔지만 소위 ‘학제적 그림’이란 말은 다른 세계의 얘기 같았다. 그럼에도 아직 만화가의 길은 멀기만 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아주 소박하게 초심으로 돌아가자’였다. 자신의 성장기 15년을 함께한 반려견 ‘낭낙이’와 갓 입양한 고양이 ‘순대’를 주인공으로 한 웹툰을 작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친구들은 “감동받았다”며 정식 웹툰 작가 데뷔를 권유했다.

2011년은 웹툰시장이 막 눈을 뜨려는 시기였다. 포털사이트들은 대대적으로 작가 발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마추어 만화가들은 포털의 신인 등단 코너를 통해 편집자들의 발탁을 기다렸다. 경쟁이 무척 치열했다.

드 디어 신인 연재 4회 만에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재 한 달 뒤에는 한 포털에서 제안이 왔고, 두 달이 되기 전에는 경쟁 관계인 다른 포털에서도 연재 요청을 받았다. 두 개의 ‘메이저리그’를 저울질한 끝에 그녀는 한 곳을 택해 당당히 웹툰 작가로 등단했다.

“현재의 모습에 매우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아마도 늙어 죽을 때까지 만화를 그리고 있겠죠. 얼마 전에 제 사인회에 고등학교 시절 제 습작 만화를 구매했던 독자 한 분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더라고요. 주저앉아 울 뻔했어요. 구체적인 꿈요? 아마도 38세까지는 서울에서 만화를 그릴 테고 그 이후에는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만화를 그리겠죠? 전 만화 이외에는 큰 꿈이 없어요.”

“지난 15년간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캐릭터에 녹였습니다.” 마흔 살 웹툰 작가 김양수 씨에게 연재작 ‘생활의 참견’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지난 15년간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캐릭터에 녹였습니다.” 마흔 살 웹툰 작가 김양수 씨에게 연재작 ‘생활의 참견’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 소년을 꿈꾸는 아저씨 이야기

2008년 2월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만 5년이 됐다. 임어당 선생의 ‘생활의 발견’이란 제목을 살짝 비튼 ‘생활의 참견’이다. 김양수 작가(40)의 나이는 마흔이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다.

얼마 전까지 웹툰시장은 30, 40대의 독무대였다. 강풀(26년, 순정만화) 윤태호(이끼, 미생) 곽백수(가우스 전자) 김규삼(쌉니다 천리마마트) 현용민(웃지 않는 개그반) 강도하(위대한 캐츠비) 등 만화가들은 인터넷에 대한 빠른 적응력을 무기로 웹툰시장의 첫 세대가 됐다.

20대 작가군과 달리 40대 전후 작가들은 월간지부터 주간지, 스포츠신문을 거쳐 웹툰에 이르기까지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친 사람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 만화 부활의 주역이 됐다. 물론 그 와중에 사라진 작가도 많지만 김 작가는 살아남았다. 웹툰시장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다.

‘생활의 참견’은 이번 주 519회를 업데이트했다. 현존하는 웹툰 가운데서 최장수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이 대박을 낸 후 작가들이 화자(話者)로 등장해 가벼운 에피소드를 전달하는 ‘생활형 웹툰’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했다. 특히 유머러스한 캐릭터에 담아낸 일상생활의 지혜는 활용도가 탁월하다. 최근 모바일 메신저에서는 문자 대신 웹툰 캐릭터를 그대로 전송하는 ‘그림 대화’가 인기인데, ‘생활의 참견’ 캐릭터는 꾸준한 인기몰이를 지속 중이다. 작가는 캐릭터가 좀 변하긴 했다고 설명한다. “캐릭터를 구상한 지 15년이 흘러서 헤어스타일과 턱선이 크게 달라졌지만 이해 부탁드립니다.”

너무도 만화를 좋아했던 김양수 소년은 초등학교 때 연습장에 직접 그린 ‘김양수 만화’로 스타 대접을 받았다. 친구들은 이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려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실력에 자신감을 얻은 소년은 중학생이 되자 아예 만화 월간지 공모전에 도전할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마지막 세 장을 남기고 어머님께 발각되고 말았다. ‘귀한 아들을 입시에 소홀하게 만든 죄’를 뒤집어쓴 만화들은 즉각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했다. 사실 그 시절 대한민국 부모님이라면 누구라도 엇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1997년 PC통신에 음악 관련 글을 쓰다가 당시 유명 월간지 기자로 일한 것이 놀랍게도 만화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주로 문화 기사를 쓰던 도중 어릴 적 장기를 살려 가끔 편집장께 게재를 요청했다. 1998년 편집장이 빈 지면에 시험 삼아 게재를 허락한 만화는 독자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잡지 만화로 시작했지만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인기를 확장해 가며 결국 웹툰이란 신흥시장에 정착했어요. 만화 제작도 펜에서 태블릿까지 온갖 것을 다 써봤지요. 사실 얼마 전까지 종이에 만화를 그려 스캔을 받은 후 컴퓨터로 채색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웹툰이 점차 자신의 기사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갖게 되자 2009년부터는 아예 10년 경력의 기자생활을 접고 ‘전업 만화가’로 나섰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수많은 웹툰 독자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김 작가의 만화는 모두 논픽션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만화로 형상화해 친근하게 전달해준다. 그는 인생의 단맛은 물론이고 쓴맛도 적절한 웃음으로 승화해 낸다.

“따지고 보면 정확하게 중간세대인 거죠. PC통신과 인터넷을 청춘시절에 겪었기에 LP가 주는 아날로그의 맛도 알고 CD가 주는 디지털의 편리함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끝까지 간직해가며 평생 만화가로 남고 싶습니다.”

그는 40대 웹툰 작가들이 함께 의기투합해 만든 ‘케이코믹스’를 통해 웹툰시장의 확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기업들이 웹툰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서 출판, 브랜드, TV광고, 영화, 게임, 이모티콘에 이르기까지 시장이 대폭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은 성공적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그저 평생 만화와 함께 살고 싶을 뿐이다. 어릴 적 꿈에 대한 아련한 향수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소년이었다.
▼ 작가가 말하는 ‘나는 왜 웹툰을 그리는가’ ▼

● 사람들 엉킨 마음 치료하는 기분… 김국현(‘낭만오피스’ 작가)

“나는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중간에 한번 그만두긴 했지만, 지금은 즐기며 그림을 그린다. 사실 그 누구라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 무언가 그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어릴 적엔 그림을 그리고 즐기지 않는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마음을 정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이 됐든, 만화가 됐든 펜으로 끄적인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 중 하나다.

이전에 그리다 중단한 그림을, 10년 전 직장생활을 하다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다시 시작했다. 어떤 삶이건 인생이란 답답한 측면이 있다. 부조리의 연속이다. 그때 구상한 ‘낭만오피스’는 일종의 부조리 만화였다. ‘왜 보스는 나를 괴롭힐까.’ 이 궁극적인 질문,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이런 것들로 괴로워질 때마다 그것을 그림이라는 형태로 정리하면서 나름의 치유를 하게 됐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엉킨 마음도 이런 과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내가 살아갈 길에 놓인 수많은 인물이 만화의 캐릭터가 됐다. 참, 꼭 만화일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 안에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만 알면 그만이다.”
● 독자들 관심과 응원에 깜짝 놀라… 와루(‘스마일브러시’ 작가)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줄곧 만화가를 꿈꿨다. 학창시절 만화를 빼면 아무것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꿈을 키워 왔고 꿈을 이뤄가고 있다.

웹툰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홍익대 앞 어딘가에서 밴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정식 연재가 확정됐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연재 제안을 e메일로 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첫 사인회도 잊기 어렵다. ‘아무도 모를 텐데… 몇 명 안 올 텐데…’라고 고민했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독자들이 나를 찾았다.

정식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무명으로 방황하던 시간이 길었기에 지금의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포기할까 생각도 여러 번 했고 위기의 순간도 많았기 때문이다. 초조하게 블로그에 올리던 일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자 어느새 일기가 웹툰 형식을 갖추게 됐다.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스스로도 작가라는 칭호가 어색하긴 하지만, 작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내가 그리는 그림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내가 즐겨 보던 다른 작가들과 동료가 된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라고.”
● 내 작품이 평가된다니 매일 짜릿… 이광수(그림)-손제호(스토리)(‘노블레스’ 작가)

“어릴 적부터 창작자를 꿈꿔왔다. 언제나 그런 생각으로 철저한 준비를 거쳤다. 그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중 창작의 한 장르인 웹툰에 도전하게 됐다. 창작자의 꿈을 키우면서 만화를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만화란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한 장르였기 때문이다.

웹툰의 시작은 무척이나 도전적인 일이었다. 웹툰은 매주 연재를 올릴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이 곧장 나오기 때문에 무척이나 긴장된다. 사실 작품이 올라갈 때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를 짜고 스토리를 진행하는 모든 작업과정 내내 긴장해야 한다.

이제는 웹툰이 대중적인 문화이자 장르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많은 독자들이 우리의 작품을 보고 즐거워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들이 우리 작품을 평가해준다는 것은 창작자 입장에서 가장 큰 고통이자 행복이기도 하다.

만화가를 꿈꾼 것은 우리에게 만화를 통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도 어릴 적에 만화가 있어 행복했다. 매번 이 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응원은 정말 큰 힘이 된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O2#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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