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슈베르트의 마법에 숨마저 멎다

  • 동아일보

라두 루푸 피아노 리사이틀 ★★★★★

첫 내한 리사이틀에서 라두 루푸는 시냇물이 흘러가듯 속삭이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루푸는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공연 사진을 촬영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첫 내한 리사이틀에서 라두 루푸는 시냇물이 흘러가듯 속삭이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루푸는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공연 사진을 촬영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객석 분위기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피아노계의 현자(賢者). 라두 루푸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피아노로 다가와 등받이 의자에 몸을 기댄 1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마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연주회장 내의 공기가 일순간 멈추며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황금기 시절 어느 한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놀라운 장면이 연출됐다. 그리고 꽃잎을 박차며 날갯짓을 시작하는 나비의 그 탄력적인 순간을 연상케 하는 첫 운지(運指)로부터 탐미적 서정성으로 가득 찬 음색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피아노 음색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리듬이나 템포, 대비와 구조 같은 음악적인 해석의 차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오로지 아름다운 음향으로 장식된 감각의 제국을 구축하는 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바로 그 아름다움 하나만으로도, 슈베르트로만 꾸며진 그의 첫 내한 공연은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안겨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낙차가 큰 음량은 아니지만, 피아니시시모조차 홀 전체를 가득 메우는 충만감과 양손 성부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한결같이 부드럽고 화사한 진행, 음표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혼합하여 만들어낸,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황홀하고도 신비로운 음향으로 슈베르트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 극적으로 그려냈다.

소박함과 우아함의 기기묘묘한 장면을 담아낸 16개의 독일 춤곡이 연주된 뒤 이어진 네 개의 즉흥곡 D.935에서는 평면에서 입체를 구성하는 농염한 채색을 흐드러지게 펼쳐내며 청중의 숨소리마저 압도해 버렸다. 예스러운 양손의 시간차 주법도 살짝 선보이며 음색의 층위를 켜켜이 쌓아나가는 한편, 거미줄에 맺힌 이슬에 반사된 영롱한 빛을 알알이 만들어내는 듯한 그의 아르페지오는 건반을 친다는 뜻의 타건(打鍵)보다는 건반을 울린다는 뜻의 향건(響鍵)이 더 어울렸다.

2부에서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 D.960은 그가 슈베르트를 음악가라기보다 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부정형(不定形)으로 움직이는 듯한 주제선율이 손에 잡힐 듯 투명하게 진행되고, 표현은 음의 세기가 아니라 음향의 농도와 채도로 조절되는 듯 숨 막히는 레가토를 통해 시적인 상상력을 더해 갔다. 특히 2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에 이르러서는 그 깨질 듯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감상자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듯한 비현실적인 긴장감을, 4악장 알레그로에서는 영원 속으로 날아가 버릴 듯한 무지갯빛 선율미로 놀라운 비상감을 보여줬다. 시간이 흘러감을 겨우 깨닫게 해준 미스터치마저 꼭 있어야 할 아름다움의 요소로 인식된 루푸의 경이로운 슈베르트의 세계, 그가 꼼꼼하게 수놓은 그 비단결 같은 피아노 음색을 온몸에 칭칭 두른 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비단 필자의 마음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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