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농업은 인류에게 질병을 주고, 진화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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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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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진화, 뜨거운 주제들- 농경사회의 명암

고대 이집트 테베의 동쪽 지역에서 발견된 벽화의 일부. 추수한 곡식을 운반하는 사람들과 가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의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DB
고대 이집트 테베의 동쪽 지역에서 발견된 벽화의 일부. 추수한 곡식을 운반하는 사람들과 가축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의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DB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 집은 큰집이었어요. 어린 시절 추석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음식을 마련하느라 바빴지요. 지금은 언제든 먹을거리를 살 수 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은 ‘일 년 중 가장 먹을 것이 풍부한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을 명절로 삼아 기념했습니다.

인류는 1만여 년 전부터 식물로 먹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행복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미개인은 하루 종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지만, 농경민은 쉬엄쉬엄 일해도 배불리 먹을 만큼 풍족했습니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모여서 살 수 있게 됐고, 병에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한가한 생활 덕분에 화려한 도시 문명도 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풍요로운 삶이 다 농경 덕분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반세기에 걸친 인류학자들의 계속된 연구 결과입니다. 결과적으로 농경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 수렵인보다 못한 농경민의 삶

인류학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미개인’들과 몇 년 동안 같이 살면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습니다. 하루 종일 놀고먹어도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일하고 쉴 여유가 있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 종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도 않았습니다. 영양실조와 전염병 같은 질병도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농경민이 된 뒤에 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옛 사람들의 뼈를 조사하면서 밝혀졌습니다. 농경을 시작한 집단의 치아에서 움푹 팬 골이 눈에 띄게 많이 발견됐습니다. ‘에나멜질 형성부전(enamel hypoplasia)’이라는 증상 때문인데 에나멜질(법랑질)이란 치아 표면의 가장 단단한 부분을 말합니다. 에나멜질은 성장기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데, 그게 치아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깁니다. 옛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데도 영양 부족에 시달린 것이지요. 몸의 크기도 작아졌습니다. 농경을 시작한 집단은 팔과 다리의 길이가 예전보다 짧아졌습니다. 역시 영양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농경은 주식(主食)에 집중하는 식생활을 불러왔고 이 때문에 영양 불균형이 심해졌습니다. 다양한 먹을거리를 채집하는 수렵채집민은 그렇지 않지요. 태풍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면 농경민의 영양 부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농사 이외의 방법에서 다른 먹을거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음 농사가 끝날 때까지 배고픔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정착민 노린 병원균의 영리한 진화

질병도 늘어났습니다. 충치와 풍치를 예로 들어 볼까요. 농경사회에서는 주식인 곡물에 물을 부은 뒤 익혀서 부드럽게 만들어 먹습니다. 우리가 밥을 짓는 모습을 떠올리면 되죠. 그런데 이런 식생활은 충치를 불러옵니다. 양치질과 치과 치료가 보편화되지 못한 사회에서 충치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합니다. 게다가 잇몸에 염증이 생기면(풍치) 이가 빠질 수도 있습니다. 염증이 온몸으로 퍼지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은 전염병에도 취약해졌습니다. 땅에 묶인 신세가 되니 병이 돌아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병이 돌면 온 마을이 피해를 보고, 질병은 곧 이웃마을까지 번졌습니다. 병원균도 진화했습니다. 예전에는 병원균이 숙주를 죽이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숙주가 죽으면 병원균도 죽을 테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 살자 병원균은 숙주를 죽이고 다른 숙주로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여기에 가축으로부터 옮겨 온 병까지 더해졌습니다. 인간은 전례 없는 강력한 질병의 공세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인구는 늘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바로 출생률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혼자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4∼5년 동안 아이를 낳지 않던 엄마들이 이제는 2년 터울로 아이를 낳기 시작했습니다. 비결은 이유식이었습니다. 곡식 중심의 식생활이 자리 잡으며 어느 정도 큰 아이에게 젖 대신 죽과 미음을 먹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구 증가가 또 다른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인구가 늘자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더 큰 농경지가 필요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비좁은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으로 사망자가 늘자 다시 더 많은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여자들은 아이를 업은 채 밭을 갈며 삶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조지 아멜라고스 미 에머리대 인류학과 교수는 “농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 유전학과 농경의 재발견


그럼 농경은 우리 인류에게 해만 끼쳤을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인류의 유전학적 다양성은 모두 농경 덕분입니다. 다양성의 원동력은 돌연변이인데요. 이 돌연변이는 집단이 클수록 많이 생깁니다. 농경 덕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자 돌연변이가 늘어났고, 결국 유전자도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다양한 유전자는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면 진화가 멈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농경이 발달하면서 인류 유전자는 더 다양해졌습니다. 문명이 인류 진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입니다.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고 인구가 늘면서 인류의 진화는 더 빨라졌습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오늘날 인류는 ‘고령 인구의 증가’라는 전에 없던 현상에 직면했습니다. 인류가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고령화는 인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류 진화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문화가 인류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에 따르면 분명 지금의 고령사회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진화를 이끌 것입니다.

※이 글은 ‘과학동아’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동시 연재됩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농경사회#인류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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