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팽나무 가지에 제주여인의 소원 걸렸네

  • Array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유홍준 지음/472쪽·1만8000원·창비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와흘 본향당’. 팽나무에 ‘물색천’과 ‘소지’가 걸려 있다. (아래)유홍준 교수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은 ‘영실’의 진달래 능선. 창비 제공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와흘 본향당’. 팽나무에 ‘물색천’과 ‘소지’가 걸려 있다. (아래)유홍준 교수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은 ‘영실’의 진달래 능선. 창비 제공
책이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이미 흘러간 여름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더구나 이번 주제는 렌터카를 빌려 제주의 속살에 다가가려는 육지인을 위한 제주도 답사기라니. 제주를 여러 차례 여행했지만 관광지가 아닌 제주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답사하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7권 제주도 편을 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993년 시작한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지난해 출간한 제6권 ‘인생도처유상수’까지 국내 인문서 최초로 판매 300만 부를 돌파했다. 눈부시고 이색적인 자연으로 육지인들에게 선망의 여행지인 제주가 인기 기행문과 만났으니 책의 첫 장을 펼칠 땐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책은 제주의 문화유산뿐 아니라 역사와 사람, 자연까지 두루 다뤘다. 저자는 전작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로 전남 강진과 해남을 꼽았듯이 ‘제주답사 일번지’로는 제주시 조천읍과 구좌읍을 추천했다.

제주도 동북쪽에 있는 조천과 구좌는 바다와 오름 등 아름다운 자연도 볼거리지만 오래된 고을이어서 제주 고유의 토속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조천읍 와흘리 ‘와흘 본향당(本鄕堂)’ 팽나무에 주렁주렁 걸린 알록달록한 천과 하얀 종이가 이방인의 호기심을 끈다. 제주에는 1만8000 신(神)이 살고 있다는데, 마을마다 이들을 모신 신당(神堂)을 본향당이라고 한다. 제주 여인네들은 본향당의 ‘할망(할머니)’ 신에게 하소연을 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푼 뒤 분수껏 ‘카운슬링비’를 내며, 넉넉한 사람들은 할망이 옷을 해 입도록 물색천을 걸어둔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한지인 ‘소지’를 가슴에 대고 소원을 빈 뒤 나뭇가지에 거는 풍습도 있다. 까막눈 할머니들을 위해 생겨난 의식이라는데 그 절실한 마음이 짐작돼 더욱 애틋하다. 본향당은 제주 여인네들이 인생 곳곳의 중요한 사건들을 신에게 신고하는 ‘영혼의 동사무소(주민센터)’라는 말이 와 닿는다.

저자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한라산 윗세오름에 이르는 등산길인 영실을 주저 없이 지목했다. 오백장군봉, 진달래 능선, 구상나무 자생군락, 그리고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영실 답사를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교향곡에 비유하면 라르고, 아다지오로 전개되다가 알레그로, 프레스토로 빨라지면서 급기야 마지막에는 ‘꿍꽝’ 하고 사람 심장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추사 김정희가 9년간 유배돼 살던 서귀포시 대정읍도 빼놓을 수 없는 답사지다. 대정은 위대한 명작 ‘세한도’를 탄생시킨 곳이자 추사체를 완성시킨 곳으로 알려졌다.

1964년 제주의 젊은 해녀들이 물질 작업장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날 해녀들은 고무옷을 입지만 1970년대까지는 ‘물옷’이라고 해서 어깨끈이 달린 무명이나 광목 소재의 ‘물소중이’ 위에 ‘물적삼’을 입었다. 사진 속 해녀들은 물소중이만 입고 있다. 제주대 박물관 소장
1964년 제주의 젊은 해녀들이 물질 작업장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날 해녀들은 고무옷을 입지만 1970년대까지는 ‘물옷’이라고 해서 어깨끈이 달린 무명이나 광목 소재의 ‘물소중이’ 위에 ‘물적삼’을 입었다. 사진 속 해녀들은 물소중이만 입고 있다. 제주대 박물관 소장
추사에게 내려진 유배의 구체적인 형벌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의 가시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중형으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이 일정한 지역 안에 머물러야 하는 ‘주군안치(州郡安置)’를 당했던 것에 비해 훨씬 가혹했다. 많은 이들이 다산은 귀양살이를 통해 현실을 발견했으나 추사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둘의 형벌을 비교하며 “추사는 현실 대신 자아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가졌는지도 모른다”고 해석한다.

처참했던 4·3사건의 흔적, 굳센 제주 여인을 상징하는 해녀의 역사, ‘원조’ 돌하르방이 따로 있다는 사실, 그리고 천연기념물 제주마(馬)에 대한 이야기도 펼쳐진다. 저자의 재치 있는 입담과 함께 책으로나마 제주 구석구석을 거닐다보면 제주가 속살을 벗고 내게 다가오는 듯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제주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제주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