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으아아악∼굳은 살 뜯어진다… 으랏차차∼세상을 번쩍 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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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원주여고 역도부 선수들은 왜 바벨에 삶을 걸었나

빅뱅의 태양을 좋아하는 여고생 다애가 금세 다른 사람이 됐다. 태양 이야기를 하며 얼굴이 새빨개지던 수줍음 많은 모습은 사라지고 온 힘을 모으려 이를 앙다문 모습이 천생 역사(力士)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빅뱅의 태양을 좋아하는 여고생 다애가 금세 다른 사람이 됐다. 태양 이야기를 하며 얼굴이 새빨개지던 수줍음 많은 모습은 사라지고 온 힘을 모으려 이를 앙다문 모습이 천생 역사(力士)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1 진주(김진주·16)가 하얀 탄산마그네슘 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옷에 한 번 쓰윽 닦는다. 부끄러운 듯 웃으며 손을 편다. 여고생의 보송보송할 것만 같은 손바닥에 딱딱하고 하얀 것 6, 7개가 볼록 솟아 있다. 지원이(박지원·16) 손에도, 주연이(이주연·17) 손에도 켜켜이 쌓인 뒤 압착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듯 밀도 높고 크게 퍼진 굳은살이 가득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면도날로 벗겨내면 돼요.” 손을 물에 불린 뒤 면도날로 굳은살을 베어낸다는 ‘잔인한’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한다. 제거되지 못하고 쌓여 있던 굳은살은 바벨을 잡을 때 통째로 뜯겨 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손바닥과 바벨이 온통 피로 물들지만 붕대를 감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100kg 안팎의 바벨을 든다.

11일 강원 원주시 엘리트체육관 역도장. 원주여고 역도부 선수 3명이 더이상 뭔가를 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된 손으로 다시 바벨을 잡는다. 이들은 다음달 전국체전에는 출전하지 않지만 다음 대회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백 번 바벨을 들어올린다. 손 안의 굳은살은 바벨을 감당해야 하는 힘겨움을 증명하듯 밀도를 높이며 커지고 있다.

#2
다애(박다애·18), 별이(태별이·18), 향이(김향·17)가 눈이 위로 당겨 올라갈 정도로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어 올렸다. 소녀들은 검은 핀 10여 개로 잔머리 한 올 튀어나오지 않게 머리카락을 모두 두피에 밀착시켰다. 온전히 드러난 맨얼굴. 이제 거추장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 ‘파이팅’이라 외치고 ‘으아’ 하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0.5초도 지나지 않아 100kg에 가까운 바벨을 ‘번쩍’ 들어올렸다.

12일 코 앞에 닥친 전국체전을 준비하는 같은 학교 역도부 선수 3명은 한체대 역도장에 모였다. 키 150cm에 53kg인 작고 다부진 다애는 제 몸무게보다 30kg은 더 나가는 바벨을 드느라 온 얼굴이 일그러졌다. 집에 빅뱅의 태양 사진을 걸어놓고 태양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새빨개지는, 평범한 여고생 다애의 모습은 바벨을 들 때만은 완전히 사라진다. 수줍음 많은 소녀들의 표정은 가로 세로 2m 남짓한 사각형 경기대에만 들어서면 오로지 바벨에만 모든 정신, 근육, 힘을 집중하려는 듯 세상에서 가장 다부진 표정으로 바뀐다. 몸의 작은 힘 하나라도 허투루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입은 앙다물어지고 바벨이 무거울수록 얼굴은 더 일그러진다. 그러나 머리 위로 올라간 바벨을 내려놓는 순간 이들의 표정은 금세 풋풋한 여고생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방금 들어올린 육중한 바벨이 고무로 된 경기대와 맞닿아 내는 ‘퉁투두둥’ 맑은 소리가 풋풋한 표정과 뒤섞인다. 4, 5년 전 중학교 1학년 시절, 차갑고 낯설고, 그래서 도망가고 싶게 했던 무서운 바벨이 내는 ‘퉁투두둥’ 하는 소리가 이젠 참 좋다.

○ 소녀, 바벨과 첫 대면하다

너 역도 한 번 해볼래. 네? 유도요? 아니 역도. 아 네, 유도요…. 이상한 대화가 오갔다. 2007년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향이는 옆 학교 역도 감독에게서 ‘역도’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 생소한 단어는 평소 알고 있던 비슷한 단어로 바뀌어 귓속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여자축구선수 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있는 원주로 전학 온 향이. 그는 운동이라면 처음 듣는 역도든 잘못 들은 유도든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향이는 자신이 여덟 살 때 함께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할아버지와 단둘이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2년 뒤 탈북해 서울에서 돈을 벌고 있는 엄마 대신, 북한에서 돌아가신 아빠 대신 늘 향이와 함께했다.

그러나 전직 축구선수의 타고난 재능은 숨기는 게 더 어려웠다. 체육시간에 현란하게 드리블하는 모습은 역도선수를 물색하러온 옆 학교 역도 감독의 눈에 바로 띄었다. 향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축구화를 신고 공을 차던 시절 발에만 가득하던 굳은살이 손에도 박인다는 게 신기했다. 공에서 느껴지지 않던 바벨의 차가운 감촉이 신기해 바벨을 또 잡았다. 향이와 탈북하다 한 차례 강제 북송을 당해 죽을 고초를 넘겼고, 향이를 데리고 얼음 언 강을 건너며 죽을 고비를 또 넘겼던, 향이에게는 목숨 같은 할아버지가 “역도를 하면 참 좋겠다. 그러면 우리 향이가 남한에서 더 빨리 성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했다. 그렇게 역도를 시작했다.
▼ 근육통 시달리는 여고생들, 오늘도 이를 악문다… 가족을 위해 ▼

바벨에 집중하려 머리를 질끈 묶고 리본 핀 대신 볼품없는 검은 핀을 수십 개 꽂았지만 이들도 웃음 많고 예쁜 평범한 여고생이다. 사진 왼쪽부터 별이, 향이, 다애, 주연이, 지원이, 진주(아래쪽 사진).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바벨에 집중하려 머리를 질끈 묶고 리본 핀 대신 볼품없는 검은 핀을 수십 개 꽂았지만 이들도 웃음 많고 예쁜 평범한 여고생이다. 사진 왼쪽부터 별이, 향이, 다애, 주연이, 지원이, 진주(아래쪽 사진).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주연이는 태권도 도장 관장이던 아버지가 “너는 태권도보다는 역도를 하면 잘할 체형”이라며 역도장에 데려갔다. 역시 역도가 뭔지 몰랐다. 태권도 유도처럼 ‘도’로 끝나니까 비슷한 운동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사람이, 여자가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바벨을, 그것도 번쩍 하고 들어 올려야 하는 운동.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초 역도장에서 테스트를 받느라 하루 종일 바벨을 잡은 손에서 나는 비릿한 쇠냄새가 이상하게 좋았다. 무거운 것을 번쩍 들어 올리고, 한껏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 마침내 환한 미소를 짓는 선배들이 멋졌다. 생전 처음 맡는 생소한 쇠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역도를 해야지.”

역도를 하면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원주에서 제일 좋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는 진주도, 역도를 하다 그만둔 사촌언니의 추천을 받은 별이도, 체육시간 달리기 경기 때 바람같이 질주하다 역도 감독의 눈에 띈 다애도,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고 신나게 뛰었던 육상대회에서 눈에 띈 지원이도 모두 우연히 역도를 시작했다.

여고생들은 우연히 시작한 역도가 좋다. 온몸의 관절과 근육을 모두 써야 하는 탓에 늘 통증을 달고 살고, 바벨에 쓸린 빨간 흉터가 가득하지만 행복하다. “잘 앉아 있지도 못 해요. 서서 운동하고 공중에 앉은 듯한 자세로 연습하는 게 습관이 돼서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쑤시는 듯이 아프고 근육 통증이 더 많이 느껴져요. 손은 바벨과 탄산마그네슘 가루 마찰에 찢어지기 일쑤고요. 그런데 기록이 1kg 늘잖아요. 6개월간 그 1, 2kg을 못 늘려서 울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번쩍 들어지잖아요. 그럼 온몸의 통증이 ‘싹’ 풀려요.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게 얼마나 기쁜지.”

○ 역도는 과학이고 나는 여자다

바벨이 좋아 일찌감치 인생을 바벨에 내걸었다. 여고생들이 다 한다는 리본핀 하나도, 머리띠 하나도 온전히 바벨에 집중하기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 가냘픈 몸매의 여고생이 되는 길 대신에 하체를 근육으로 무장하고 최대한 큰 상체를 가진 범상치 않은 여고생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역도에 대한 온전한 집중력을,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흔들어놓는 말들이 있다.

“역도는 그냥 막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무식한 운동’이잖아”라는 말이 그렇고 “너 100kg 든다던데 쌀은 몇 가마니나 들 수 있냐”는 질문이 그렇다. 지난 4, 5년 바벨을 가장 효율적으로 들기 위해, 더 많은 중량을 들기 위해 몸의 균형을 맞추는 연습을 하고, 온몸의 근육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연습을 방학도 없이 한 그들에게는 비수가 꽂히는 듯한 말이다.

역도는 힘센 사람이 쇳덩이를 그저 들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운동일까.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들어 올릴 수 있는 바벨의 중량도 비례해 늘어나니 체중만 늘리면 되는 단순한 운동일까.

이한경 용인대 교수(스포츠미디어학)는 “역도는 주사위처럼 몸의 전후좌우 균형이 세밀한 수준까지 맞아야 비로소 가능한, 과학적인 운동”이라고 했다. 인상 경기를 하는 선수는 바벨을 가슴 가까이 끌어올린 뒤 팔꿈치를 완전히 펴고 바벨 밑으로 빠르게 주저앉았다 일어서는 복잡한 동작을 단 0.5초 안에 모두 소화해야 한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힘을 폭발적으로 모았다가 0.5초 안에 체계적으로 분출해 내야만 바벨을 안정적인 자세로 들어올릴 수 있다. 역도가 ‘순발력 절정의 운동’이라 불리는 이유다.

선수는 바벨을 몸에 가까이 붙인 상태에서 최대한 수직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들어 올리려 한다. 용상 경기 때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가 벌어지는 각도, 어깨까지 끌어올린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 전 경기대를 차는 강도 등 모든 동작에 인체과학이 적용된다. 용상 경기 중 바벨을 일시적으로 가볍게 느끼게 해주는 점프 동작인 ‘저크(jerk) 구르기’ 하나와 관련해서도 몇 도의 각도로, 몇 번이나 할 때 가장 효과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이 교수는 “역도는 모든 근육과 관절을 세밀하게 구분하고 분석한 뒤 0.5초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스포츠 과학의 절정”이라고 했다.

“어떻게 여자가 역도를…”로 시작하는 말들도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역사들에게서 바벨을 들 힘을 빼앗아 간다. 실제로 한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 여자 역도선수를 검색하면 ‘여자 역도선수 결혼’이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어로 맨 위에 뜬다. 이 단어로 다시 검색하면 누군가 올려놓은 “여자 역도선수는 어떤 식으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나요”라는 황당한 질문을 볼 수 있다.

역도는 섬세한 스포츠다. 신체 각 부위의 각도를 분석하고, 온몸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파악해야만 1kg이라도 더 무거운 바벨을 드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도를 하는 여자선수들은 어떤 여성보다도 더 섬세하다. 원주여고 역도부 선수들 역시 경기대를 나서면 여느 여고생들과 다를 바 없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이다.

장미란 선수 등장 이후 편견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자가 역도를’과 ‘무식한 운동’이라는 일부의 편견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이런 편견에도 여고생들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바벨을 드는 이유는 뭘까.

원주여고 역도부원들에게 가족은 온갖 근육 통증에도 바벨을 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향이는 자신에게 역도를 권했고, 전폭 지원해 줬지만 이제는 위암으로 위를 절제하고 병상에 있는 할아버지를 위해 역기를 든다. 합숙을 하느라 2개월째 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우리 향이 성공하는 거 못 보고 죽으면 어쩌냐”라고 말하며 손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향이는 이번 체전에서, 다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자신이 멋지게 바벨을 드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다시 웃기를 바란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고 돌아오는 그날 할아버지가 역도 훈련에 지친 자신에게 늘 해주던 이름 모를 음식을 해주길 기대한다. 아프기 전 할아버지는 향이가 연습을 하고 돌아오면 말린 오징어를 물에 불려 채를 썬 뒤 청양고추를 넣어 볶아 만든 반찬을 향이 입속에 넣어주고는 했다.

진주는 40년 된 낡은 집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자신을 기다리는 엄마에게 새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별이는 식당을 운영하며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를 위해 바벨을 하루에 수백 번 들어 올린다.

편견을 딛고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바벨을 들어 올리는 철든 선수들에게 “어떤 여자 역도선수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물었다. “평범한 여고생으로 살 수 있는 길, 예쁘게 꾸미고 다니고 싶은 마음 다 포기하고 매일 바벨을 들어올리는 여자 역도선수는 누구라도 존경스러워요. 그 어려움이 뭔지 아니까… 역도를 하는 여자는 누구나 위대해요.” 우문에 현답을 들려준 선수들이 오늘도 땅을 꺼지게 할 듯 힘차게 발을 구르고, 세상을 모두 들어 올릴 듯 두 팔로 바벨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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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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