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딘 현악사중주단은 4일 생기 넘치는 연주와 새로운 해석으로 한국 관객을 매료시켰다. 고양문화재단 제공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모두들 사라졌다. 어떤 이는 망명했고, 또 어떤 이는 노쇠해 떠났다. 그래서 유일한 창설 멤버인 발렌틴 베를린스키가 2007년 여름 은퇴하고 이듬해 12월 15일 작고했을 때 자진 해체했어야 한다는 주장마저 제기됐다. 결성 67년을 맞이한 보로딘 현악사중주단이 4일 일말의 우려 속에 경기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내한 공연을 가졌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과거에 비하여 스타일이 달라지긴 했어도 네 명의 구성원은 훌륭한 앙상블을 엮어냈다. 제1바이올린을 맡은 루벤 아하로니안은 활 전체를 낭비 없이 자재로이 사용하여 차진 톤을 자아냈다. 작년에 입단해 제2바이올린을 맡은 세르게이 로몹스키는 악기가 스스로 노래하는 것을 돕는다는 느낌을 줄 만치 조력자 역할에 충실했다. 비올리스트 이고리 나이딘은 사중주 음에 완전히 용해되는 포근한 소리를 들려줬다. 첼리스트 블라디미르 발신의 풍성한 저음도 붙임성 있게 다가왔다. 1부 프로그램은 차이콥스키 현악사중주 B플랫 장조와 현악사중주 1번. 오크 통에 담아 숙성한 고급 와인 같은 향이 물씬 풍겨 나오는 그윽한 연주였다.
하이든 현악사중주 작품33-6은 이 단체가 서유럽 사중주단과 흡사한 세련된 방향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굳혀주었다. 낙낙한 하모니에 의해 홀 안의 공기가 따스한 온도로 데워졌다. 베토벤 대푸가 작품133에선 강한 추동력이나 격한 마찰감에 의지하지 않는 정제된 해석을 제시하여 놀라움을 주었다. 네 대의 악기가 열여섯 줄로 이루어진 하나의 현악기처럼 그 음향이 전후좌우로 촘촘하게 겹쳐졌다. 질문과 응답, 긴장과 이완,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철인의 형이상학은 본연의 내적 논리를 타고 세포 분열하듯 장대한 다성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목에 따라 악센트 처리가 약해 교향악적 구도가 축소된 것은 아쉬웠다.
보로딘 사중주단은 앙코르로 보로딘 현악사중주 2번 3악장, 일명 녹턴을 선사했다. 첼로와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취할 듯 감미로운 선율을 주고받았다. 음색과 음량의 밸런스가 절묘한, 아늑한 화톳불 같은 연주였다. 같은 작곡가의 스페인풍 세레나데도 수려했다. 시대가 변하고 단원이 교체되어도 그들은 자신이 겉껍데기가 아닌 ‘진짜 보로딘’이라는 것을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음악으로 증명했다.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의 부드러운 잔향 조건도 감동에 일조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