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사람]봉달이 레이스는 끝났어도 어머니 기도는 멈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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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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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마라토너 이봉주의 어머니

‘봉달이’ 이봉주(왼쪽)가 마지막 레이스인 대전 전국체전 마라톤경기(2009년 10월)에서 우승한 뒤 어머니 공옥희 씨를 끌어안고 있다. 동아일보DB
‘봉달이’ 이봉주(왼쪽)가 마지막 레이스인 대전 전국체전 마라톤경기(2009년 10월)에서 우승한 뒤 어머니 공옥희 씨를 끌어안고 있다. 동아일보DB
《 순간 머리털이 곤두섰다. 입에선 비명 소리조차 안 나왔다. ‘좀 뛰다 보면 괜찮아질까.’ 착각이었다. 누군가 바늘로 무릎을 마구 쑤시는 듯한 느낌.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면 온몸의 세포가 일어나 “아프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주저앉았다. 처음이었다. 42.195km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하고 나서 그가 달리던 도중 쓰러진 적은. 그리고 이땐 몰랐다. 이 한 번의 주저앉음이 기나긴 슬럼프로 이어지게 될 줄은. 》
아프고, 또 지치다

봄의 문턱에 이른 1992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해 바르셀로나 올림픽(7월) 대표 선발전을 겸한 동아마라톤(3월)을 한 달쯤 앞둔 시점에서, 22세 이봉주는 훈련 도중 피로골절로 그렇게 쓰러졌다.

‘올림픽 하나만 보고 달렸는데….’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아팠다. 목표가 있을 땐 몰랐던 고통이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허리에서 발가락까지 몸은 성한 데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수도승 생활이나 다름없는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올림픽에서 라이벌 황영조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전지훈련장에서 TV로 조용히 지켜봤다. 뭉클한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커졌다. 그즈음 한 동료가 훈련이 힘들다는 이유로 홧김에 돌로 자기 발을 찍어 운동을 포기했다. 그런 행동마저 이해가 됐다. 탈출구를 원했던 그는 결국 훈련지 이탈이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제 마라톤은 끝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어머니….’

6일 경기 화성시의 자택에서 만난 이봉주는 “레이스 도중 포기하고 싶을 때면 항상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화성=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6일 경기 화성시의 자택에서 만난 이봉주는 “레이스 도중 포기하고 싶을 때면 항상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화성=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항상 그랬듯 애틋한 목소리로 “봉주야,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으시는 어머니. 오늘도 절에 가서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오셨다는 말에 차마 운동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운동화를 벗을 자신이 없었다. 시골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에 비하면 내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이렇게 늦은 사춘기 홍역을 치른 그는 다시 훈련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17년 뒤 은퇴하는 그날까지 풀코스(42.195km)만 41회 완주했다.

“얘야, 우리 봉주 잘 달리고 있니?”


1970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봉주의 집은 가난했다. 20세 때 작은아버지의 소개로 맞선 봐 시집 온 어머니는 언제나 쉴 틈이 없었다. 어려운 형편에 농사일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시동생 다섯과 자식 4남매,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약주를 즐겨 했다. 그럴 때면 목소리가 커지고 어머니는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냥 꾹꾹 참았다. 힘들다고 내색하지도 않았다. 다만 가끔씩 나지막하게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어린 봉주는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어머니는 가끔 막둥이 봉주만 데리고 버스를 타고 충남 아산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봉주는 그때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가는 길에 어머니의 콧노래를 들어서 즐거웠고, 잠시나마 어머니가 쉴 수 있어서 좋았다.

학창 시절 봉주는 축구를 좋아했다. 레슬링 선수였던 형을 보면서 복싱과 태권도에도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선택은 육상이었다. 축구화 한 켤레 마련하기 힘든 가난이 이유였다.

어머니는 봉주가 운동하는 걸 반대했다. 형이 레슬링을 하다 실패한 모습을 옆에서 본 데다 뒷바라지하기 힘든 가정형편도 걱정이 됐다. 무엇보다 훈련하느라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봉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라톤을 하려고 고등학교를 4년 동안 세 군데나 옮겨 다녔다. 결국 어머니는 그런 봉주의 손을 들어줬다.

1992년 호된 시련을 겪은 봉주는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는 등 ‘국민 마라토너’로 이름을 날렸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봉주의 경기를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그 대신 봉주의 형에게 “잘 달리고 있느냐”고만 물었다. 어머니는 막둥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시드니 올림픽이 열린 2000년 9월, 어머니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봉주를 직접 응원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에 응원을 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필 이때 봉주는 레이스 도중 넘어져 경기를 망쳤다. 경기 직후 모자(母子)는 인근 한인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봉주의 숟가락에 조용히 반찬만 얹어줬다. 밥이 목구멍에 넘어갈 리 없을 터. 하지만 봉주는 말없이 꿀꺽 밥을 삼켰다. 말을 안 해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일까. 모자 사이에는 힘겨운 미소와 함께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마지막 레이스가 끝난 뒤

2001년 4월의 어느 날. 보스턴 마라톤을 앞두고 막바지 훈련이 한창일 때 새벽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봉주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작은누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천안으로 내려갔다. 몇 년 동안 췌장이 좋지 않아 고생하신 아버지였지만 막상 돌아가셨다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머니는 봉주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항상 슬퍼도 꾹꾹 누르기만 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서글프게 눈물을 쏟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봉주의 손을 잡은 어머니는 아버지 영정에 대고 통곡했다. “봉주가 이렇게 멋진데,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왜 벌써 가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에 누구보다 아팠을 어머니. 하지만 그날 이후 적어도 봉주에게만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혹시 훈련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기에 봉주는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훈련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열린 보스턴 마라톤.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우셨을까, 아니면 어머니 사랑의 힘일까. 봉주는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렸고, 1등으로 결승선을 끊었다. 보스턴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고향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날, 봉주는 옆자리에 선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2009년 10월 21일.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핑크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대전에서 전국체전이 열린 이날 아들은 마지막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시간 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들이었다. 봉주를 맞이한 어머니는 순간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만 울라며 어머니를 달래던 봉주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봉주는 “이제 엄마 마음고생 안 시켜도 되니 효자 노릇 좀 하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선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고, 둘은 또 펑펑 울었다.

이봉주의 어머니 공옥희 씨(75)는 아직도 아들을 ‘애기’라고 부른다. 자식들이 이제 편하게 사시라고 하지만 여전히 고향에서 밭일을 한다. 봉주는 더 이상 뛰지 않지만 아들을 향한 공 씨의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주변에서 아들 하나 잘 키웠다고 말하면 공 씨는 손사래를 친다. “우리 애기만 생각하면 미안하지. 잘 먹이고 잘 입히지도 못하고, 제대로 업어주지도 못했는데. 잘 커준 것만으로도 그냥 고마워.”

화성=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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