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간호사관학교 개교 이래 처음 입학하게 된 남생도들이 입학식 전날인 22일 저녁 선배들로부터 ‘예모 깃’을 받은 뒤 박수를 받으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다. 이 ‘명예의식’을 통해 예비생도들은 선배들에게 정식 후배로 인정받는다. 대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저녁이 되자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당 앞뒤에 자리한 4층짜리 건물에서도 약속이나 한 듯 형광등이 모두 꺼졌다. 네댓 개의 가로등과 간이 서치라이트 두 개가 마당을 비추는 유일한 불빛이었다. 마당에는 잔디밭 사이로 원 모양을 따라 폭 3m 정도의 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면 50∼60m쯤 될까. 100명 정도가 반팔 간격으로 나란히 둘러서면 꼭 맞을 크기다. 오후 7시가 가까워오자 불 꺼진 건물에서 흰색 예복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자 앞쪽에 꽂힌 50cm가 훌쩍 넘는 흰 깃털이 유난히 눈에 띈다. 흰 깃털들은 삽시간에 자신이 설 곳을 찾아갔다. 자리를 확인한 뒤엔 길 바깥둘레를 따라 안쪽을 바라보며 섰다. 표정들이 무척 밝다. 1년간 손꼽아온 순간이 아닌가. 이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 20분 정도 지났을까, 진행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56기 예비생도들! 입장합니다!”
“와∼!” “오∼!” “우∼!”
200여 명의 흰 깃털이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누군가의 이름을 경쟁적으로 불러대기 시작했다. 흡사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들처럼 필사적이다. 날카로운 고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동안 또 한 무리가 뒤쪽 건물에서 줄지어 나왔다. 같은 예복 차림이지만 뭔가 동작이 어설프다. 흰 깃털도 없다. 길 안쪽둘레를 따라 나열한 이들은 미리 자리해 있던 흰 깃털들과 마주 보고 섰다.
국군간호사관학교(국간사) 56기 사관생도들의 입학식을 하루 앞둔 22일 저녁. 사관생도들이 생활하는 숙소 건물 앞마당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 선후배의 첫 만남
흰 깃털은 2∼4학년 재학생도(올해 승급 후 기준)들이고, 긴장한 얼굴로 그들과 마주한 ‘노 깃털’은 4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예비생도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명예의식’ 때문이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명예선서’를 하고, 선배는 군인으로서의 첫 문턱을 넘은 후배에게 ‘예모 깃(흰 깃털)’을 달아준다.
1학년이 될 예비생도는 깃을 달아주는 2학년 선배(55기)의 ‘시스터’가 된다. 2학년 위에는
1년 전 그에게 깃을 달아준 3학년(54기)이, 그 위에는 또 4학년(53기)이 있어 이들을 함께 ‘시스터 라인’이라고 부른다. 개교 61년 만에 처음으로 남생도 8명이 들어왔으니 이제 명칭을 ‘시스터 앤드 브러더 라인’이나 ‘패밀리 라인’ 따위로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비생도 85명 모두가 이날의 주인공이었지만 남생도를 ‘시스터’로 맞은 선배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임채원 예비생도(18)를 후배로 맞은 서지나(21·4학년) 김연희(22·3학년) 박규리 생도(19·2학년)는 벌써부터 “우리 후배가 제일 잘생겼다”는 자랑이 앞선다. 서 씨는 “남생도를 시스터로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정말 환영한다”며 “앞으로 4년간의 생도 생활을 선배들이 전폭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권재혁(19) 이연주(19) 두 남녀 후배를 ‘쌍둥이 시스터’로 한꺼번에 받은 김예은 생도(21·4학년)도 “재학생 사이에서 어떤 시스터 라인에 남생도가 들어올지 꽤나 큰 관심사였다”면서 “우리 라인은 남자, 여자를 둘 다 받게 돼 정말 기쁘다”고 했다.
선배들은 예모 깃 수여식이 끝난 직후 자유시간을 틈타 후배들의 입에 초콜릿, 비스킷, 음료 등을 넣어줬다. 훈련을 받는 동안 먹고 싶어도 참아야 했던 간식들이다. 숙소로 돌아가면 지도생도(4주간 기초 군사훈련을 돕는 조교)들에게 모두 빼앗길 걸 알면서도 예복 가방에 먹을거리와 마스크 팩 등을 꾸역꾸역 쑤셔 넣어준다. “어떻게든 숨겨서 몰래 먹어라”란 애정 어린 조언과 함께. 처음에는 “예비생도 ○○○! 받으면 안 됩니다!”라고 완강히 거부하던 후배들도 선배들의 ‘무력’에 제압당한 채 순순히 가방을 열어줬다. 남생도들은 피부 미용을 위한 마스크 팩이 자기 가방에 들어오는 장면을 그저 얼떨떨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끌벅적한 선배들과의 첫 대면식을 끝낸 예비생도들은 23일 입학식을 치르고야 공식 사관생도가 됐다. 지난달 28일 입소한 이들에게 지난 4주는 결코 쉽지 않은 날들이었을 터. ‘예비’라는 단어를 떼어낸다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일지 상상이나 했을까.
○ 공포의 빨간 립스틱들
“아직도 못 외운 생도는 누군가! 내일도 이렇게 버벅댈 건가!”
명예의식 전날인 21일 오후 11시경. 보급품 출하 탓에 다소 늦은 점호를 받던 예비생도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예행연습 도중 누군가 ‘신입생도 명예선서’를 틀린 것이다. 몇 차례 연습을 더한 뒤 지도생도의 전달사항이 이어진다. 더 딱딱해지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다.
“내일 상급 사관생도가 마스크 팩, 사탕, 초콜릿 같은 것을 주면 절대 받지 않는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면 곧바로 분대장 생도에게 제출한다. 몰래 갖고 있다 걸리면 단체로 책임을 묻는다. 알겠나!”
훈육장교와 함께 기초 군사훈련을 책임지는 지도생도(4학년 승급 예정자)는 모두 13명. 학생회장에 해당하는 대대장 생도와 참모 5명 그리고 명예위원회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일단 당연직으로 포함된다. 나머지 5명은 지원자 중 면접을 거쳐 선발한다. 지도생도로 발탁되려면 일단 동기 사이에서 신임도가 높아야 하고, 외적 군기(카리스마)와 내적 군기(명예심, 군인정신)가 모두 뛰어나야 한다. 이들은 후배들을 직접 키운다는 자부심으로 3주의 겨울방학도 기꺼이 반납한다. ▼ 잠옷바람 여생도 마주칠까 취침 시간엔 방에서 못나가 ▼
21일 늦은 밤 8분대장인 채유리 지도생도가 ‘라운딩’을 마치기 전 남자 예비생도들에게 마실 물을 건네고 있다. 파란색 하트무늬가 새겨진 남생도들의 잠옷은 하얀 단색 잠옷을 입는 여생도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왼쪽). 원래 국군간호사관학교 예복 가방은 한쪽 어깨에 메는 핸드백이었다. 남생도가 들어온 올해부터는 남녀 공용의 크로스백 형태로 바뀌었다(가운데). 남생도들의 식욕은 동기들이나 지도생도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일부 여생도들은 “남생도들이 나보다 밥을 2배나 먹는데 식사 시간은 절반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대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지도생도들에겐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이는 빨간 립스틱이 바로 그것. 지도생도는 예비생도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밥 먹는 모습조차 숨기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평소에는 화장을 잘 하지 않지만 지도생도가 되면 강렬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하루 서너 시간만 자는 강행군이 계속되면 이들도 체력적 한계에 다다른다. 훈련 막바지로 가면 급한 대로 빨간 립스틱만 바르고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게다가 빨간색은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카리스마’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단다.
훈육장교인 김은경 소령(36·국간사 39기)은 “지도생도들에게 올해는 빨간색을 바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빨간색만 고집하더라”며 웃었다. 한 지도생도는 “훈육장교께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시절 빨간색 립스틱에 대한 기억이 너무 무서웠다며 바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며 “그래도 전통처럼 내려오는 것이어서 그냥 바른다”고 귀띔했다.
한편 이들은 ‘밀당’(밀고 당기기의 준말)의 대가들이다. 일과시간에는 강하게 몰아쳐 고삐를 죄지만 취침점호 후에는 ‘라운딩’(분대장이 분대원들의 방에서 부드러운 질문과 대답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것)을 통해 인간적인 선배로 다가간다. 군대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김 소령은 “예비생도들은 누구나 자기 분대장을 최고로 꼽는다. 가장 무섭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청일점들이 살아가는 법
56기 예비생도들은 77명이 여자(1∼7분대), 8명이 남자(8분대)다. 김 소령은 키 174cm의 채유리 생도에게 남생도들을 이끌 8분대장을 맡겼다. 채 생도는 당당한 체격도 체격이지만 남생도를 압도할 수 있는 체력과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도 부담이 없을 리 없다. 예비생도들이 처음 입소하면 밥 먹는 방법부터 속옷 개는 요령까지 모든 것을 분대장이 가르쳐야 한다. 남자 속옷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데 정리법을 알리 만무했다. 국간사 교본에는 야속하게도 여자 속옷을 정리하는 방법만 나와 있다. 다행히 지난해 11, 12월 국군수도병원에 실습을 나갔다가 육사생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배웠고, 그것이 곧 남생도를 위한 지침서가 됐다.
막상 교육이 시작되자 시행착오는 더 많아졌다. 예비생도들이 처음 군장을 싸던 날이었다. 연병장에서 필수품목을 모두 군장에 넣었는지 하나하나 점검에 들어갔다. 교관이 “전투복 1벌”을 외치면 각자 군장에 전투복을 넣었는지 확인하고, 빠뜨린 생도는 자발적으로 열 밖으로 나가 얼차려를 받는 식이다. 중간쯤 됐을까. 교관이 “패드 20개”를 외쳤다. 순간 남생도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들은 본 적이 없는 물건인데 군장에서 꺼내라고 하니 당황한 것이다. 몇몇은 군장을 뒤적거리다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열외를 하더란다. 채 생도는 이에 “남생도는 패드(생리대)가 없다”고 다시 외쳐야 했다.
지도생도들이 예비생도들의 침실이나 공부방에 불시에 들어가 생활지도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무리 훈련생과 교관이라고 할지라도 남자와 여자가 아니던가.
“먼저 노크를 하고 셋을 센 다음 ‘분대장 생도가 들어가겠다’고 말한 뒤 다시 셋을 세고 들어갔어요. 불시점검은 아예 꿈도 못 꾼 거죠.”
남생도들 스스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취침에 들어가기 직전 남생도 7명(1명은 불침번을 서고 있어 참석하지 못함)을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들어봤다.
우선 불편한 점이 많을 듯했다. 방윤혁 생도(19)는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첫손에 꼽았다. 고작 8명인 데다 그마저도 전부 운동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뭘 하든 팀을 짜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 주말 등을 이용한 운동시간에 주로 한 것은 보통의 남자들이 즐기는 축구나 농구가 아닌 피구였다. 무조건 왼손으로 던진다는 핸디캡이 주어졌지만 여자들과 함께하다 보니 아무래도 ‘살살’ 할 수밖에 없었을 터. 입학 후에도 축구는 할 수 있을지, 학교에 농구 골대가 있는지 물어봐도 정확한 답변이 돌아오는 경우가 없었다. 이러다 4년 내내 피구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될 법했다.
이승주 생도(19)는 좀 더 현실적인 부분을 토로했다. 취침시간 이후에 물을 마시러 방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예비생도는 취침시간이 되면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새로 디자인한 남자용 잠옷은 괜찮지만 속옷이 비치는 여자용 흰색 잠옷이 문제였다. 여생도들도 잠옷을 입은 채 남자와 마주치는 것을 꺼렸다. 결국 남생도는 지도생도의 허락 없이는 취침시간 이후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소수의 서러움이랄까. 분대장인 채 생도도 이 점이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라운딩을 할 때마다 텀블러나 큰 컵에 물을 가득 담아왔다. 자기 전에라도 물을 원 없이 마시라는 배려였다.
남생도들은 의외로 좋은 점도 많이 언급했다. 여자들은 77명이 1시간 동안 목욕탕을 사용하는 데 비해 남자들은 8명이 30분 동안 사용해서 좋다는 이도 있었고, 일부는 아침점호 후 여자들과 함께 뛰니까 크게 힘들지 않아 좋다고도 했다. 특히 남생도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더 친해졌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상훈 생도(20)는 “훈련이 힘들어도 ‘여자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오기가 생긴다”고 말했다. 약한 생각이 들 때마다 여자 동기들로부터 자극을 받는다는 얘기다.
○ “남자 여자가 아닌 동기”
금남(禁男)의 구역에 첫발을 내디딘 남생도도 낯선 경험이겠지만 그들과 함께 생소한 ‘동거’를 해야 했던 여생도도 익숙한 상황은 아닐 터였다. 김 소령은 “남생도들에게 지나친 관심이 쏠리면서 여생도들이 상대적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며 “어떤 생도는 수양록에 ‘우리는 들러리가 되는 분위기다’라고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O₂는 주말인 19일을 활용해 예비생도 전원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을 했다. 이때 남생도와 함께 생활하면서 느끼는 좋은 점과 불편한 점도 물어봤다. 상당수 여생도는 “학교 자체가 사회적 관심을 받는 것은 기쁘다”면서도 “그런데 그 관심이 너무 남생도에게만 집중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같은 일을 해도 남생도가 더 후한 점수를 받는다”는 시샘 어린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8분대가 분위기 메이커다” “남생도들이 유머가 있어 전체에 활력을 준다” “힘든 일을 잘 도와줘서 좋다” 등 긍정적인 답변을 쏟아냈다.
학교 측도 여생도와 남생도 간의 ‘동기애’를 자연스럽게 심어주는 것을 주요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김 소령은 운동을 할 때도 “너희는 동기이지, 남자 여자가 아니다”라며 재차 강조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분대광고나 군가경연대회에서 남생도들이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서로의 벽을 허무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 셈이다.
“기초 군사훈련은 동기애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남자라서 걸음이 빠르더라도 느린 여자 동기를 위해 천천히 가야 하고, 반대로 걸음이 느린 사람은 동기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하죠.”
육사 출신인 현창용 대위(정훈장교)도 “모든 사관생도 출신이 ‘생도 생활은 혼자 하라면 못하지만 같이 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만큼 군대에선 동기애가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남생도와 여생도.
국간사에서는 이 용어 자체도 낯설다. 그리고 56기 사관생도 사이에서도 아마 더 쓰이지 않을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불편함도 있겠지만 그런 점들까지 서로 감싸주는 ‘동기’라는 멋진 단어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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