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속편 내라” 출판사 압박하는 팬들

  • 동아일보

때로 수지 안 맞아 출판사 곤혹… 번역 실수, 고칠때까지 항의도
원서 먼저 읽고 출간 제안도 해

“3부 안 내주면 출판사에 불낼 거예요. ㅠㅠ”

미국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은행나무) 시리즈는 출판사엔 애물단지였다. 2000년 1부 4권, 2001년 2부 4권을 냈지만 8권 합쳐 3000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권당 1200쪽이나 되니 번역비와 제작비를 따지면 책을 낼수록 손해였다.

은행나무는 3부 출간을 포기하려 했지만 몇몇 마니아 팬들이 책을 내달라며 간청 겸 협박을 해왔다. 하는 수 없이 2005년 3부 2권, 2008년 4부 2권을 냈는데 4부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팬들이 “번역자가 (각기 다른 용도의 칼을 뜻하는) ‘sword’ 와 ‘knife’를 혼용하는 등 판타지 용어에 익숙지 않다”고 항의한 것이다. 결국 출판사는 4부를 새로 번역했고 3월 재출간할 예정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이 소설이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지난해 국내서도 방영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지난해 한 해에만 7만 부 이상 팔리며 ‘효자 상품’이 된 것. 이진희 은행나무 편집주간은 “낼 때마다 고민했고 항상 부담스러웠으며 그만큼 미운 정도 쌓였던 작품이다. 이젠 마니아 팬들이 고맙다”며 웃었다.

출판계에서 장르 소설 마니아 팬은 악명이 높다. 팬 층은 추리와 스릴러가 가장 대중적이고 그 다음이 중세를 배경으로 기사와 용 마법사가 나오는 판타지, 마지막으로 미래 이야기를 다룬 SF 순이다. 하지만 극성스럽기는 SF 팬들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판타지, 추리 스릴러 순이라는 평이다.

장르 소설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의 김준혁 부장은 “SF나 판타지 소설의 마니아 팬은 편집자가 잡아내지 못한 실수까지 날카롭게 집어내며 고치라고 압박한다”고 전했다. 책에 사소한 오류라도 있으면 항의하는 팬들 때문에 출판사 전화는 먹통, 홈페이지는 다운된다.

마니아 팬들은 작가의 전집을 모으는 경향이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판형과 디자인이 뒤죽박죽이면 컬렉션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 최근 역사비평사와 함께 일본 추리 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 시리즈를 펴낸 북스피어의 김홍민 대표는 “컬렉션이 됐을 때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마니아 팬들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예상외로 조용하고 수줍음을 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여성보다는 남성의 비중이 크고 연령대는 30, 40대가 많다. 김준혁 부장은 “1990년대 PC통신을 통해 장르 소설을 접했던 10, 20대 젊은이들이 20년째 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니아 팬들 중에는 스스로 장르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다. ‘7년의 밤’을 쓴 정유정 작가도 미국 장르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열성 팬으로, 데뷔 전 스티븐 킹 모임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니아 팬들은 출판사보다 먼저 원서를 읽고 출간을 제안하기도 한다. 황금가지는 마니아 팬들이 출간 제안 및 기획, 투고 등을 하는 인터넷 공간을 만들어 다음 달 공개할 예정이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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