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웃음 끝자락에 고독과 불안이 밀려온다

  • 동아일보

◇ 연극 ‘서울 노트’ ★★★☆

미술관에 온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무대 위에 옮긴 연극 ‘서울 노트’. 박광정을 기억하는 사람들 제공
미술관에 온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무대 위에 옮긴 연극 ‘서울 노트’. 박광정을 기억하는 사람들 제공
“그림 보는 일도 되게 어렵네. 사물을 보고 있는 화가가 있고, 그걸 다시 보는 거니까. 그려진 대상을 보고 있는 건지, 화가를 보고 있는 건지, 화가의 세계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돼버려.”

연극 ‘서울 노트’에서 ‘남자 1’이 미술관에서 만난 옛 과외선생 시절 여제자에게 말하는 이 대사는 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설정 자체도 의미심장하다. 무대는 미술관 로비이며 관객은 미술 작품을 보려고 모여든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지켜본다.

일본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도쿄 노트’를 번안한 이 작품은 2008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배우 겸 연출가 박광정 씨가 이끌던 극단 파크가 2003년 초연 이후 여러 차례 무대화하며 ‘조용한 연극’으로 유명해진 히라타 연극의 진수를 널리 알렸다. 이번 무대는 박 씨의 동료 연극인들이 모여 만든 박 씨의 추모 공연.

일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무대로 옮겨 놓은 듯한 히라타 오리자 연극의 특성은 이 작품에서 더욱 짙게 드러난다.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 제3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유럽에서는 서울의 미술관으로 미술품들을 피신시킨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페르메이르의 진품도 그중 하나다.

미술관 로비에 저마다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든다. 미술품을 대거 상속받은 한 여성은 친구 한 명, 변호사와 함께 미술품 기부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한다. 1년 만에 가족 모임을 갖는 4남매도 있다. 평화유지군으로 참전한 군인이 휴가 중에 애인과 함께 미술관에 놀러 오고, 페르메이르를 전공한 미대 대학원생들도 등장한다. 이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연극의 전부다.

연극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대화는 때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웃음을 불러일으키고 때론 짧은 침묵 속에 갖가지 상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17명이나 등장하는데 누구 하나 튀지 않는 자연스러운 앙상블이 돋보였다.

희곡 번역과 연출을 맡은 성기웅 씨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이, 우리가 그렇게 소란스레 떠들고 웃던 끝에 서늘하게 감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i: 박광정 씨의 부인인 배우 최선영 씨가 차남의 부인으로 출연하며 최용민 민복기 권해효 이성민 박원상 정석용 정해균 오룡 씨 등 유명 배우가 번갈아 출연한다. 12일까지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쉬는 날 없이 공연한다. 2만 5000원. 02-762-0010
#공연#서울노트#박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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